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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의 시계가 진동한다.

화면에 뜬 문장. “심장 리듬이 불규칙합니다. 병원 방문을 권장합니다.”

어제까지 이 시계는 걸음 수를 셌다.

오늘 이 시계는 심장을 말한다.

같은 기기, 같은 센서, 같은 손목이다.

그런데 법의 눈에는, 방금 이 시계 안에서 하나의 물건이 다른 물건으로 바뀌었다.

위험이 아니라 목적이 정한다

D-1의 인형에서 우리는 “안전부품인가”라는 질문이 그물의 입구였음을 봤다.

의료기기의 세계에서는 입구의 질문이 다르다. 이 소프트웨어의 목적이 무엇인가.

유럽 의료기기 규제의 실무 지침서인 MDCG 2019-11(의료기기조정그룹이 낸 소프트웨어 판정 가이드)은 이 원칙을 명문으로 박아두었다.

“환자나 사용자가 다칠 위험은, 소프트웨어가 의료기기인지를 판정하는 기준이 아니다.”1

위험해 보여서 의료기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의료 목적을 가져서 의료기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제조사가 스스로 밝힌다 — 제품 설명, 광고, 사용설명서 전체를 통해서.

판정은 대략 세 개의 질문을 통과한다.

  1. 소프트웨어인가 — 데이터를 받아 처리하고 결과를 내놓는가.

  2. 데이터를 그냥 저장하고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가공하고 분석하는가.

  3. 그 가공이 특정 개인의 진단·치료·모니터링이라는 의료 목적을 위한 것인가.

셋 다 “예”면 의료기기 소프트웨어(MDSW)다.

걸음 수 카운터는 3번에서 떨어진다. 건강에 관한 숫자지만, 질병의 진단이 아니다.

그런데 “불규칙한 심장박동을 인식해 부정맥 감지 목적으로 사용자나 의사에게 경보를 보내는 스마트워치 앱” — 이것은 MDCG 지침이 직접 든 의료기기의 실제 예시다.2

아까 그 진동이 바로 이 문장이었다.

시계는 그대로인데,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앱은 의료기기가 됐다.

의료기기가 되면 — 등급의 사다리

장난감(D-1)은 표준을 지켰는지가, 기계(D-2)는 위험 목록에 들었는지가 외부 검사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의료기기의 기준은 또 다르다. 등급(Class)이다.

잘못된 정보가 초래할 결과의 무게에 따라 사다리가 놓인다.3

  1. 진단·치료 결정에 쓰이는 정보를 주는 소프트웨어 — 기본적으로 Class IIa.

  2. 잘못되면 중대한 건강 악화나 수술로 이어질 수 있는 정보 — Class IIb.

  3. 잘못되면 사망이나 되돌릴 수 없는 악화로 이어질 수 있는 정보 — Class III.

  4. 진단에서 그치지 않고 치료까지 스스로 조절하는 시스템(혈당을 재서 인슐린을 자동 주입하는 폐루프 등) —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Class III.4

등급이 오를수록 외부 검사기관(Notified Body)의 개입이 깊어진다.

Class I은 자기선언으로 충분하지만, Class IIa부터는 반드시 검사기관이 들어오고, Class III은 설계 전체를 심사받는다.

여기서는 관문이 실제로 열린다

D-1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인형의 AI는 두 관문 — 안전부품인가, 외부 검사 대상인가 — 에 걸리지 않아 AI Act의 고위험 그물 밖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의료기기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의료기기법(MDR)과 체외진단기기법(IVDR)은 AI Act 제품 목록(부속서 I)의 11번과 12번 항목이다.

그리고 진단 정보를 주는 AI 앱은 위의 사다리에서 최소 Class IIa — 반드시 외부 검사기관을 거친다.

관문이 실제로 열리는 것이다. 손목 위의 진단 AI는, 인형 속 대화 AI와 달리, AI Act의 고위험 규율에 정면으로 도착한다.5

“이 앱은 의료기기가 아닙니다”

앱을 내려받다 보면 이런 문구를 만난다.

“본 앱은 의료기기가 아니며, 제공되는 정보는 의학적 진단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문구의 정체가 보인다.

이것은 겸손한 면책 문구가 아니라, 규제 그물 밖에 있겠다는 선언이다. 의료 목적을 표방하지 않음으로써 자격판정의 3번 질문에서 “아니오”를 만들려는 것이다.

다만 문구만 바꾼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은 문구 한 줄이 아니라 광고·설명서·기능 전체를 놓고 판단한다. 심장 리듬을 분석해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앱이, 각주 하나로 의료기기가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필자 분석]

“위험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기준에는 묘한 우아함이 있다.

리스크를 재기 전에 정체부터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제조사 자신의 입에서 받아낸다 — 네가 이 제품을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제조사는 자기 말에 묶인다.

약점도 같은 자리에 있다.

“웰니스”라는 회색지대다. 사실상 진단에 가까운 정보를 주면서도 의료 목적은 표방하지 않는 제품들이 이 경계선 위에서 산다. 그물의 가장자리가 제조사의 문장 위에 그어져 있는 셈이다.

D 시리즈의 구도로 보면 이렇다.

인형(D-1)의 AI는 몸이 안전해서 그물 밖에 있었다. 기계(D-2)의 AI는 몸이 위험해서 그물 안에 있었다.

그런데 손목 위의 AI는 몸 때문이 아니다. 말의 내용 — “이것은 진단입니다”라는 약속 — 이 그물 안팎을 갈랐다.

몸을 기준으로 삼던 규제가, 의료의 영토에서만큼은 말을 기준으로 삼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자리

이제 네 개의 물건이 모였다.

인형, 믹서기, 로봇 잔디깎이, 스마트워치. 전부 같은 CE 마크를 달고 있지만, 그 마크 뒤의 여정은 네 갈래로 갈라졌다.

마지막 글에서는 이 네 갈래를 한 장의 지도로 그린다. 내가 산 제품의 CE 마크는, 누가 확인한 것인가.


한줄 코멘트.

손목 위의 앱은 심박수를 재는 순간이 아니라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의료기기가 된다. 규제는 기능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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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DCG 2019-11, Guidance on Qualification and Classification of Software in Regulation (EU) 2017/745 – MDR and Regulation (EU) 2017/746 – IVDR (2019.10), §3.1 — “the risk of harm … is not a criterion on whether the software qualifies as a medical device.” MDCG(의료기기조정그룹) 문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실무 지침임. 상세는 [[mdcg-2019-11-software-qualification-classification]]·[[MDSW-자격판정과-분류]] 참조. 

  2. MDCG 2019-11, §3.2 Note 1 — “MDSW smartwatch app, which is intended to send alarm notifications to the user and/or health practitioner when it recognises irregular heartbeats for the purpose of detecting cardiac arrhythmia.” 

  3. Regulation (EU) 2017/745 (MDR), Annex VIII Rule 11 — 진단·치료 결정용 정보 제공 SW는 기본 Class IIa, 중대 악화·수술 초래 가능 시 IIb, 사망·비가역적 악화 초래 가능 시 III. 

  4. MDR, Annex VIII Rule 22 — 진단 기능이 환자 관리를 결정하는 폐루프(closed loop) 시스템은 Class III. 

  5. AI Act(Regulation (EU) 2024/1689), Annex I Section A 11번(MDR)·12번(IVDR) 및 Article 6(1) — Class IIa 이상은 MDR Article 52에 따라 Notified Body 관여가 필수이므로 3자 적합성평가 요건이 충족되어 고위험 트리거가 실제로 작동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