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1] 같은 법을 읽고 왜 다른 결론이 나오는가
공원 입구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탈것 출입 금지.”
자동차는 안 된다. 그건 분명하다. 그럼 자전거는? 유모차는? 전동휠체어를 탄 사람은 공원에 들어갈 수 없는가.
법철학자 하트(H. L. A. Hart)가 1961년에 던진 이 유명한 질문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1 언어의 그물은 성기다. 세상은 그 그물코 사이로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법이 언어로 짜여 있는 한, 법을 읽는 일은 언제나 해석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블로그에서 줄곧 규제를 읽어 왔다. EU의 제품안전 체계를 읽었고, AI Act를 읽었고, 이제 한국의 인공지능기본법과 EU AI Act를 나란히 놓고 읽으려 한다. 그 전에 한 번은 짚고 가야 할 질문이 있다.
법은, 어떻게 읽는 것인가.
대법원이 정해 둔 읽기의 순서
한국 대법원은 법을 읽는 공식 순서를 판례로 정해 두었다. 법해석의 목표는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는 데” 있으며,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을 원칙으로 하되, 입법 취지와 목적, 제·개정 연혁,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를 추가로 동원한다는 것이다.2
이 한 문장 안에 네 개의 렌즈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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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적 해석 — 용어와 문장의 통상적 의미로 읽음. 언제나 출발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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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 해석 — 그 조문이 놓인 구조로 읽음. 같은 법의 다른 조문, 이웃한 법령과의 관계를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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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해석 — 입법자가 그 조문을 만들 때의 의사로 읽음. 제·개정 이유서가 단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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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론적 해석 — 법이 실현하려는 목표로 읽음. 신기술처럼 법문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게가 커짐.
순서가 중요하다. 문언이 명확하면 거기서 멈춘다. 특히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지우는 조문은 가능한 한 엄격하게 읽는다. 렌즈를 겹칠수록 해석자의 재량이 커지고, 재량이 커질수록 법적 안정성(같은 조문은 언제 누가 읽어도 같아야 한다는 요청)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같은 조문, 정반대의 결론
이론은 여기까지다. 실전은 더 흥미롭다.
산업통상자원부 법무팀의 내부 강의 자료에 실린 실제 사례 하나.3 자율주행차 실증특례(규제샌드박스, 규제를 한시적으로 면제하고 실증하는 제도)를 받은 기업이 특례 연장을 신청했다. 관련 법률은 개정이 끝났지만, 그 법을 작동시키는 고시(행정기관이 정하는 세부 규정)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연장 요건은 “법령이 정비되지 않은 경우”였다.
여기서 질문. 법률은 고쳐졌는데 고시가 없다면, “법령”은 정비된 것인가 아닌가.
부처 자체 법무 검토는 “고시·훈령까지 포함해 법령으로 본다 — 고시가 없으니 미정비, 연장 가능”이라 읽었다. 외부 자문은 “법률 개정이 완료됐으니 정비 완료, 연장 불가”라 읽었다.
같은 조문이다. 같은 사실관계다. 결론은 정반대였다.
이것이 법령해석의 실체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문언의 그물코가 넓은 자리에서, 한쪽은 제도의 목적(기업이 규제 공백으로 사업을 접게 해서는 안 된다)을 무겁게 읽었고, 다른 쪽은 문언의 경계(법령은 법규명령 — 법률·시행령·시행규칙 — 까지다)를 무겁게 읽었을 뿐이다.
저울의 반대편도 있다. 오존층 보호 법령 위반을 인지한 공무원은 형사소송법상 “고발하여야 한다.” 문언은 의무다. 그런데 법원은 가벌성이 없는 등의 사정이 있으면 고발하지 않을 재량을 인정했다.4 “하여야 한다”라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문언조차, 구체적 타당성 앞에서 휘어진 것이다.
[필자 분석] 이 오래된 행정법 사례가 지금 AI 규제의 한복판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한국 인공지능기본법은 프론티어 AI의 연산량 산정방식, 투명성 의무의 적용 예외, 공공 우선구매 대상의 확인 기준 같은 핵심 기준을 대부분 고시로 위임해 두었다. 고시가 나오기 전까지, 법의 문장은 미완성이다. “법령이 정비되지 않은 경우”를 둘러싼 그 해석 다툼이, 이번에는 AI 사업자의 의무 범위를 두고 벌어질 것이다. EU도 다르지 않다. AI Act의 요건들은 조화표준과 가이드라인이 붙기 전까지는 추상어에 가깝다. 규제의 실체는 법률의 층이 아니라 그 아래층에서 완성된다 — 그래서 두 법을 비교할 때는 “법령이 확정한 것”과 “고시를 기다리는 것”을 반드시 구분해 읽어야 한다.
두 개의 AI법 앞에서
다음 글부터 우리는 한국 인공지능기본법과 EU AI Act를 나란히 놓는다. 그때 이 네 개의 렌즈를 들고 간다.
문언을 비교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두 법이 놓인 체계(한국은 진흥법의 몸에 규제 조항을 얹었고, EU는 제품안전법의 뼈대 위에 서 있다)를 읽고, 제정이유서에 남은 입법자의 의도를 읽고, 각 법이 실현하려는 목적을 읽어야 비로소 비교가 된다.
같은 법을 읽고도 결론이 갈리는 이유는, 법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법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줄 코멘트. 법의 문장은 스스로 완결되지 않는다 — 문언·체계·연혁·목적의 네 렌즈를 통과하고, 안정성과 타당성의 저울에 얹힌 다음에야 법이 된다. 두 개의 AI법을 비교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도구도 이 렌즈들이다.
공원의 안내판은 오늘도 서 있다. 유모차를 밀고 온 사람은, 잠시 멈춰 서서 안내판을 읽는다. 그 잠깐의 멈춤 — 거기서 법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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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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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L. A. Hart, The Concept of Law (1961). “공원에 탈것 금지(No vehicles in the park)” 사례는 법문언의 ‘핵심부(core)’와 ‘반음영부(penumbra)’를 설명하는 법철학의 고전적 예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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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10. 12. 23. 선고 2010다81254 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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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 법무TF, 「사례로 보는 산업부 법률 이야기 — 제1강: 법령해석 등」. 자율주행차 실증특례 연장 사례(신청기한 도과의 강행규정·훈시규정 논점, 신뢰보호 원칙 검토 포함)와 이하의 오존층보호법 고발 사례가 이 자료에 수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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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1970. 9. 3. 선고 69노558 판결 (강의 자료 재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