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 내 차에는 왜 CE 마크가 없는가
새 차를 인수한 날, 이 시리즈를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이 있다.
차를 한 바퀴 돌며 CE 마크를 찾아보는 것.
문틈, 엔진룸, 유리창 구석.
없다. 인형에도, 믹서기에도, 시계에도 있던 그 두 글자가, 이 집채만 한 물건에는 없다.
대신 글로브박스 안에 서류 한 장이 들어 있다.
적합성 증명서(CoC, Certificate of Conformity).
이 종이가, 자동차가 CE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다.
선언의 세계와 허가의 세계
D 시리즈에서 본 CE의 세계는 선언의 세계였다.
제조사가 “법을 지켰습니다”라고 서명하면 제품은 시장에 나가고, 당국은 나중에 확인한다.
자동차는 반대다. 허가의 세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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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국 정부의 승인당국(approval authority)이 차량 형식(type)을 심사해 형식승인증명서를 발급함 — 이 증명서 없이는 단 한 대도 팔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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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승인당국이 지정·감독하는 기술서비스(Technical Service)가 수행함 — 제조사가 고르는 CE 세계의 검사기관(NB)과 달리, 당국의 손발로 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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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는 생산되는 모든 차 한 대 한 대에 대해 “승인받은 형식과 같다”는 증명서(CoC)를 발급함 — 글로브박스의 그 종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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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기준의 원천은 유럽 표준(EN)이 아니라 UN 규정임 — 1958년 제네바 협정 이래 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에서 각국이 합의해 온 국제 기술규정 체계임.
흥미로운 뒤집힘이 하나 있다.
C-1에서 우리는 “한국은 국가인증, EU는 자기선언”이라고 정리했다.
그런데 자동차에서는 정반대다. EU가 정부 허가를 요구하고, 한국 자동차는 미국식 자기인증으로 달린다.
신뢰의 구조는 나라가 아니라 제품군을 따라간다.
이 허가의 세계에도 2018년에 큰 공사가 있었다.
디젤게이트 — 허가를 받아놓고 시험 때만 착해지는 소프트웨어 — 이후, EU는 형식승인법에 시장감시라는 사후 감시 축을 통째로 새로 지었다.1
선언의 세계가 갖고 있던 “팔린 뒤를 본다”는 문법이, 허가의 세계로 역수입된 것이다.
내 차에 이미 타고 있는 일곱 개의 시스템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안전장치”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목록으로 정해진다. 일반안전규정(GSR, Regulation (EU) 2019/2144)이 2022년 7월부터 새로 승인받는 차량 형식에 단계적으로 의무화한 시스템들이다.2
지능형 속도보조, 음주운전 방지장치(알코올 인터록)를 달 수 있는 표준 접속부, 졸음·주의 경고, 첨단 주의분산 경고, 비상정지신호, 후진 감지, 사고기록장치(EDR). 여기까지가 전 차종 공통 일곱이고, 승용차에는 보행자까지 감지하는 비상제동(AEB)과 차선유지가 더해진다.
조문을 읽다 보면 설계 철학이 보인다.
속도보조는 끌 수 있어야 하고, 운전자가 제한속도를 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2 보조이지, 통제가 아니다.
졸음을 감시하는 카메라는 폐루프로 작동하고, 필요한 데이터 외에는 남기지 않으며, 제3자가 접근할 수 없고, 처리 즉시 지워야 한다.3
나를 지켜보는 눈은 허용하되, 그 눈이 기억하는 것은 금지한 것이다.
가장 무거운 몸, 가장 가벼운 AI Act
이제 이 시리즈의 마지막 반전이다.
D-2의 문법대로라면 — 몸이 무거울수록 그물은 촘촘해진다 — 자동차의 AI는 규제의 정점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AI Act를 펴면 이상한 조항이 나온다.
자동차는 부속서 I에 있긴 한데, 완구·기계가 속한 Section A가 아니라 Section B라는 별도 구역에 있다. 그리고 Section B의 제품에는 AI Act의 고위험 요건 전체가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4
인형에게는 그물이 성글어서 문제였는데, 자율주행차에는 아예 다른 그물을 쓴다.
왜인가.
자동차에는 이미 70년 가까이 묵은 국제 규제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평의 법(AI Act)이 그 위를 직접 덮으면 UN 규정과 충돌한다. 그래서 AI Act는 자동차 세계에 직접 명령하는 대신 한 문장만 심어두었다 — 자율주행 시스템의 기술규정을 만들 때, 내 고위험 요건을 “고려하라”.5
요건은 AI Act가 정하되, 그것을 소화해 조문으로 바꾸는 일은 자동차법 자신이 한다.
참고로 그 “고려하라”는 문장이 실제로 자율주행 기술규정에 어떻게 녹아드는지는 아직 진행형이다. 개정 조문 자체가 아직 자동차법 통합본에 반영되기 전이다. [검토 필요]
[필자 분석]
다섯 개의 물건과 하나의 대화창 — D 시리즈의 여섯 만남으로 이제 세 개의 문법이 모두 드러났다.
몸이 있는 AI는 물건의 문법으로 다룬다 — 검사하고, 인증하고, 리콜한다(인형·기계·시계).
몸이 없는 AI는 매체의 문법으로 다룬다 — 출처를 밝히고, 표시를 붙인다(챗봇).
그리고 바퀴 달린 AI는 외교의 문법으로 다룬다 — 국제 합의 체계에 위임하고, 정합성만 요구한다(자동차).
가장 위험해 보이는 AI(자율주행)가 AI Act에서 가장 가벼운 대우를 받는 것은 규제의 구멍이 아니라, 이 셋째 문법의 결과다.
그물의 촘촘함은 위험의 크기가 아니라 기존 제도의 성숙도를 따라 배분된다.
성숙한 체계가 있는 곳에는 위임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챗봇)에는 새 문법을 만들고, 어중간한 곳(인형)에는 — D-1에서 봤듯 — 공백이 남는다.
그래서 규제를 읽는 사람에게 이 시리즈가 남기는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새 기술이 왔을 때 물을 것은 “위험한가”만이 아니다. “이 기술이 앉을 의자가 이미 있는가”다.
의자가 있으면 규제는 빠르고 조용히 도착하고, 의자가 없으면 — 법이 의자부터 만드는 동안 — 기술은 먼저 도착해 있다.
한줄 코멘트.
자동차에 CE가 없는 것은 규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오래된 다른 문법이 있어서다. EU는 AI의 위험을 하나의 법으로 다루지 않는다 — 물건에게는 검사를, 말에게는 고백을, 바퀴에게는 외교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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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ulation (EU) 2018/858 — 자동차 형식승인·시장감시 규정(Dir 2007/46/EC 대체). 승인당국 Article 3(36), Technical Service Article 3(38), CoC Article 3(5), UN 규정 인용은 Chapter XII. 디젤게이트 후속으로 시장감시 요건이 규정 제목과 본문에 정면 편입됨. 상세는 [[regulation-2018-858-type-approval]] 참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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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ulation (EU) 2019/2144 (GSR II), Article 6(1) 전 차종 7종 의무화·Article 6(2)(b)(d) 속도보조의 해제 가능·초과 주행 비차단 요건·Article 7(2)(3) 승용차 AEB 2단계(보행자·자전거 확장)·비상차선유지. 적용일은 Annex II에 따라 2022.7.6부터 신형식 단계 적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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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ulation (EU) 2019/2144, Article 6(3) — 졸음·주의분산 경고 시스템의 폐루프 작동·최소 수집·제3자 접근 금지·처리 후 즉시 삭제. 사고기록장치의 개인 식별 금지는 Article 6(5). 참고로 안전 목적 차내 모니터링은 AI Act Article 5(1)(f)(직장 내 감정인식 금지)의 의료·안전 목적 예외에 해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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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Act(Regulation (EU) 2024/1689), Annex I Section B(자동차 형식승인 2018/858·일반안전 2019/2144 포함 비-NLF 9개 법령) 및 Article 2(2) — Section B 제품에는 Article 6(1)·102-109·112만 적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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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Act, Article 107(2018/858 개정)·Article 109(2019/2144 Article 11 개정) — 자율주행 관련 위임·시행입법 채택 시 AI Act Chapter III Section 2(고위험 기술요건)를 고려할 의무 삽입. 확보된 두 자동차법 통합본(2024.7.1·2026.1.7 기준)에는 이 개정이 아직 반영되지 않음(적용일 도래 전으로 추정, [검토 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