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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집 안을 한 바퀴 돈다.

아이 방의 말하는 인형. 주방의 믹서기. 마당의 로봇 잔디깎이. 손목의 시계.

네 물건을 뒤집어 보면 모두 같은 두 글자가 있다. CE.

같은 마크다. 그런데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본 것은, 그 마크 뒤에 숨은 네 갈래의 완전히 다른 여정이었다.

CE는 도장이 아니라 서명이다

먼저 오해 하나를 정리하자.

CE 마크는 “정부 검사에 합격했다”는 도장이 아니다.

“우리는 법이 요구한 것을 지켰습니다”라는 제조사의 서명이다.1

그렇다면 그 서명이 진짜인지는 누가 확인했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제품군마다 다르다.

네 갈래의 지도

이 시리즈가 만난 네 제품군을 한 줄씩 접으면 이렇다.

  1. 장난감 — 유럽 표준을 전부 지켰으면 아무도 확인하지 않음(자기선언). 표준을 안 지켰거나 못 지켰을 때만 외부 검사기관이 등장함. 기준은 표준을 지켰는가.2

  2. 전기제품 — 언제나 자기선언. 외부 검사 경로 자체가 없음. 기준은 없음, 전면 신뢰.3

  3. 기계 — 위험 기계 목록에 들면 무조건 외부 검사. 자기선언이 원천 금지됨. 기준은 어떤 종류의 기계인가.4

  4. 의료기기 — 등급(Class)이 오를수록 검사가 깊어짐. Class I은 자기선언, IIa부터 외부 검사, III은 설계 전체 심사. 기준은 틀리면 얼마나 다치는가.5

같은 CE 마크 넉 장.

하나는 표준이, 하나는 신뢰가, 하나는 목록이, 하나는 등급이 뒤를 받치고 있다.

왜 통일하지 않았나

넷을 하나로 통일하면 깔끔하지 않았을까.

EU가 게을러서 이렇게 둔 것이 아니다. 위험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난감의 위험은 삼킴과 중금속이다. 표준이 아주 잘 아는 위험이라, 표준 준수 여부만 물으면 된다.

전기제품의 위험은 감전과 화재다. 50년간 다듬어진 표준이 있고, 위험이 제자리에 머문다.

기계의 위험은 움직임이다. 위험이 사람을 찾아가므로, 위험한 종류를 목록으로 찍어 막는다.

의료기기의 위험은 잘못된 정보다. 정보가 틀렸을 때의 결과가 천차만별이라, 결과의 무게로 등급을 매긴다.

A 시리즈에서 봤던 비례성 원칙 — 위험의 크기에 비례해 규제의 강도를 정한다 — 이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위험의 크기만이 아니라 위험의 성격에 맞춰, 재는 자(尺) 자체를 제품군마다 다르게 만든 것이다.

다섯 번째 층 — AI Act

그리고 2024년, AI Act가 왔다.

AI Act는 이 네 갈래를 갈아엎지 않았다. 그 위에 얹혔다.

“당신 제품군에서 원래 외부 검사를 받는 물건이라면, 그 안의 AI도 고위험으로 본다.”6

기존 제품법의 외부 검사 여부를, 고위험 판정의 지렛대로 재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같은 AI가 어떤 몸에 실리느냐에 따라 네 가지 운명을 맞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1. 인형 속 대화 AI — “안전부품인가”라는 관문에 걸리지 않아, 그물 밖에 있을 가능성이 큼(D-1).

  2. 믹서기 속 AI — 목록에조차 없어 처음부터 열외임(D-2).

  3. 기계 속 자기진화 AI — 유일하게 이름까지 지목되어 최고 수준의 인증을 받음(D-2).

  4. 시계 속 진단 AI — “진단”이라는 약속과 함께 등급 사다리를 타고 고위험에 도착함(D-3).

[필자 분석]

이 40년 설계의 강점과 약점은 같은 자리에 있다.

강점은 비례성이다. 제품군마다 위험의 성격에 맞는 자를 만들었기에, 믹서기에 과잉 규제를 하지도, 인공관절에 과소 규제를 하지도 않는다.

약점은 AI처럼 제품군을 가로지르는 기술 앞에서 드러난다.

같은 알고리즘이 인형에 들어가면 그물 밖, 기계에 들어가면 그물 최상단, 시계에 들어가면 등급 나름이다. 갈래마다 구멍의 크기가 다르다 보니, 규제를 피하고 싶은 기술은 구멍이 가장 큰 몸을 찾아가면 된다.

D-1에서 본 말하는 인형이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EU 역시 그 자리를 보고 있다. 가장 큰 구멍이었던 완구를 겨냥해, 정신건강과 AI를 안전성 평가에 편입한 신 완구안전규정이 이미 제정됐다. 적용은 2030년 8월부터다.7

사용자에게 이 시리즈가 건넬 수 있는 것은 하나다.

CE 마크는 “누군가 확인했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확인했는지는 제품군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마크를 믿는 것과 마크 뒤의 구조를 아는 것은 다르며, 후자만이 정보다.

한국의 KC 인증과 이 체계가 어떻게 다른지는 C 시리즈 첫 글에서 다뤘다 — 국가가 허가하는 방식과 제조사가 선언하는 방식의 차이. 이 시리즈를 읽고 그 글로 돌아가면, 같은 문장이 다르게 읽힐 것이다.

시리즈를 마치며

D 시리즈는 네 개의 물건에서 출발했다.

인형은 말을 하는데 말을 지키는 법은 서명만 마친 채 2030년의 문 앞에 서 있었고, 믹서기는 아무도 검사하지 않았고, 잔디깎이는 최고 수준의 인증을 받았고, 시계는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물건이 됐다.

넷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였다.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몸에 있는가, 말에 있는가.

지난 40년, 유럽의 답은 “몸”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잘 작동했다.

이제 물건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40년의 답은, 아직 쓰이는 중이다.


한줄 코멘트.

CE 마크는 하나지만 그 뒤의 여정은 네 갈래다. 마크를 읽는 법을 아는 사용자에게만, 마크는 정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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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E 마킹의 일반 원칙은 Regulation (EC) No 765/2008, Article 30. 마킹의 근거 서면인 EU 적합성선언(DoC)은 제조사가 단독 책임으로 작성함. 

  2. Directive 2009/48/EC (완구지침), Article 19(2)–(3) — 조화표준 완전 적용 시 module A(자기선언), 미적용·부분적용 시 EC형식심사(module B+C). 

  3. Directive 2014/35/EU (저전압지침), Chapter 3 — Notified Body 경로 없이 자기선언(module A)만 존재. 

  4. Regulation (EU) 2023/1230 (기계류 규정), Annex I Part A 및 Article 25 — Part A 카테고리는 자기선언 불가, NB 개입 모듈(B+C·H·G)만 허용. 

  5. Regulation (EU) 2017/745 (MDR), Article 52 — Class I 자기선언(멸균·계측 등 예외), Class IIa 이상 Notified Body 관여, Class III 완전품질보증+설계심사. 

  6. AI Act(Regulation (EU) 2024/1689), Article 6(1) — 부속서 I 법령 적용 제품의 안전부품(또는 제품 자체)이면서 그 법령상 제3자 적합성평가가 요구되는 경우 고위험. 

  7. Regulation (EU) 2025/2509(신 완구안전규정) — 관보 2025.12.12, 완구지침 폐지·대체, 적용 2030.8.1. 정신건강 리스크 안전성 평가 편입(Recital 16·Article 25(2)(c))·자기선언 선택의 고위험 분류 회피 봉쇄(Recital 15). 상세는 [[regulation-2025-2509-toy-safety]]·D-1 보완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