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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주방에서 믹서기가 돌아간다.

마당에서는 로봇 잔디깎이가 혼자 풀을 깎고 있다.

두 기계의 바닥을 뒤집어 보면 같은 두 글자가 있다. CE.

같은 마크다.

그런데 이 마크가 붙기까지 두 기계가 걸어온 길은, 완전히 달랐다.

아무도 검사하지 않은 믹서기

믹서기 같은 가정용 전기제품을 다루는 법은 저전압지침(Low Voltage Directive, 이하 LVD — Directive 2014/35/EU)이다.

교류 50~1,000볼트 사이의 전기제품, 그러니까 콘센트에 꽂는 물건 대부분이 여기 속한다.

이 법의 가장 놀라운 점은, 외부 검사기관이 등장하는 경로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1

제조사가 유럽 표준에 맞춰 만들고, 스스로 “안전합니다”라고 선언하면 끝이다.

D-1의 장난감은 표준을 못 지켰을 때라도 외부 검사를 받는 길이 있었다.

믹서기는 그 길조차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조사의 자기선언뿐이다.

불안하게 들리는가.

이 방식은 1973년 원조 지침 이래 50년 넘게 유지돼 왔다. 감전과 화재라는 위험은 성격이 단순하고, 표준이 그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AI Act가 관리하는 제품 목록(부속서 I)에 LVD는 아예 없다.2

D-1의 인형은 목록에 있는데 관문에 걸리지 않았다면, 믹서기는 목록에조차 없다.

믹서기에 AI를 넣어도, 이 경로로는 고위험 AI가 되지 않는다.

인증서 없이는 시장에 못 나가는 기계

마당의 로봇 잔디깎이는 다른 법의 영토다.

2023년에 새로 태어난 기계류 규정(Machinery Regulation — Regulation (EU) 2023/1230).

가전·IT기기를 뺀 움직이는 기계 전반을 다룬다.

이 법에는 “위험 기계 목록”(부속서 I Part A)이 있다.

이 목록에 든 기계는 자기선언이 원천 금지된다. 외부 검사기관(Notified Body, 공인 검증기관)의 인증 없이는 시장에 나갈 수 없다.3

그리고 2023년, 이 목록에 낯선 두 항목이 새로 들어왔다.

  1. 머신러닝으로 스스로 진화하는(self-evolving) 거동을 가진 안전부품

  2. 그런 자기진화 시스템을 내장해 안전기능을 맡는 기계

EU 제품안전법 전체를 통틀어, AI를 정면으로 지목해 최고 수준의 인증을 강제한 최초의 조문이다.

D-1에서 말하는 인형의 AI가 안전부품이냐는 물음 앞에서 문틈만 겨우 열려 있는 사이에, 기계 속 AI는 이름까지 불려 목록 맨 앞에 세워졌다.

목록에 드는 자율 기계에 이 법이 요구하는 것들은 구체적이다.4

  1. 기계가 무엇을 왜 하려는지, 계획된 행동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알릴 것.

  2. 안전 관련 소프트웨어의 무단 변조를 막고, 변경 이력의 증거를 남길 것.

  3. 학습으로 인해 위험해지는 설정 변경은 금지할 것.

  4. 정해진 임무와 이동 공간을 벗어난 행동은 금지할 것.

  5. 안전에 관한 의사결정 데이터를 1년간 보관할 것.

어디서 본 듯한 목록이다.

투명성, 로그 보관, 인적 감독 — AI Act가 고위험 AI에 요구하는 것들과 사실상 같은 요구를, 기계안전법이 자기 언어로 먼저 써놓았다.

왜 이렇게 다른가

같은 모터, 같은 전기, 같은 CE 마크.

그런데 믹서기는 아무도 검사하지 않고, 자율 기계는 최고 수준의 인증을 받는다.

차이는 위험의 크기가 아니라 위험의 방향이다.

전기주전자는 고장 나면 멈춘다. 위험이 제자리에 머문다.

움직이는 기계는 고장 나면 사람을 향해 움직인다. 위험이 사람을 찾아간다.

손잡이에 손을 얹고 쓰는 기계와, 사람 없이 스스로 판단하며 움직이는 기계.

EU는 이 차이에 비례해서 그물의 촘촘함을 다르게 짰다.

[필자 분석]

D-1과 이 글을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구도가 보인다.

말하는 AI(인형)는 규제 그물 밖에 있을 가능성이 크고, 움직이는 AI(기계)는 그물의 최상단에 있다.

EU의 눈에 위험은 AI 자체에 있지 않다. AI가 얹힌 몸에 있다.

같은 알고리즘이라도 스피커에 연결되면 느슨하게, 모터에 연결되면 엄격하게 다뤄진다.

이 “몸 기준” 설계는 물리적 위험 앞에서는 정교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D-1에서 봤듯, 몸이 안전한 제품의 AI — 부러지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인형의 입 — 는 이 기준의 사각지대에 남는다.

다만 그 사각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완구 쪽에서는 2030년부터 적용될 신 완구안전규정이 정신건강과 AI를 겨냥해 그물을 다시 짜고 있다(D-1 보완 참조).5

한 가지 변화도 진행 중이다. 지금 논의되는 AI Act 개정(디지털 옴니버스)은 기계류를 AI Act의 직접 규율에서 빼내어, 기계 속 AI 요건을 기계법 자신이 흡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6

AI의 위험을 AI법이 아니라 각 제품법이 나눠 갖는 구조 — 이 실험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직 열려 있다. [검토 필요]

다음 자리

몸이 무거울수록 그물이 촘촘해진다면, 몸이 아예 없다시피 한 AI는 어떻게 되는가.

손목 위의 작은 시계, 그 안의 앱.

다음 글에서는 어제까지 걸음 수를 세던 기계가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따라가 본다.


한줄 코멘트.

EU는 AI의 위험을 AI에게 묻지 않고, AI가 움직이는 몸에게 묻는다. 몸이 무거울수록 그물은 촘촘해지고, 몸이 가벼우면 그물은 성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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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irective 2014/35/EU, Chapter 3 (Articles 12–15) — 조화표준(또는 국제·국내표준) 준수 후 제조사 자기선언(module A)만 존재하며, Notified Body 통보 챕터 자체가 없음. 

  2. Regulation (EU) 2024/1689 (AI Act), Annex I Section A — 12개 법령 목록에 LVD 미포함 (Machinery·Toy·RED·MDR·IVDR 등은 포함). 

  3. Regulation (EU) 2023/1230, Annex I Part A 및 Article 25 — Part A 카테고리는 module B+C·H·G만 허용(자기선언 module A 불가). Part A 5호(자기진화 ML 안전부품)·6호(자기진화 내장 시스템 기계)가 2023년 신설. 

  4. Regulation (EU) 2023/1230, Annex III §1.1.6(HMI 투명성)·§1.1.9(변조 방지·이력)·§1.2.1(학습단계 통제·이동공간 제한·안전 의사결정 데이터 1년 보관). 

  5. Regulation (EU) 2025/2509(신 완구안전규정) — 관보 2025.12.12, 적용 2030.8.1. 정신건강 리스크의 안전성 평가 편입(Recital 16·Article 25(2)(c)), 자기선언 절차 선택이 고위험 AI 분류에 영향 없음(Recital 15). 상세는 [[regulation-2025-2509-toy-safety]] 참조. 

  6. Digital Omnibus on AI(P10_TA(2026)0198, 유럽의회 1차독회 채택본 — 관보 게재 전) — 기계류 규정을 AI Act Annex I Section A에서 Section B로 이동(2028.8.2 적용 예정). [[digital-omnibus-on-ai-p10-ta-2026-01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