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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5] 자율의 얼굴을 한 규제 — 검·인증과 우선구매

한국 제30조는 검·인증을 '민간 자율'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인증을 국가기관 우선구매와 묶으면, 자율은 조달이라는 지렛대를 통해 사실상의 규제로 바뀐다. EU의 법이 잠그는 문과, 한국의 돈이 여는 문을 비교한다.


Series E. 두 개의 AI법: 인공지능기본법 vs EU AI Act : 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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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펼치는 그 문장

E-1에서 한 문장을 인용했다.
한국 AI 기본법의 제정이유서가 검·인증(검증과 인증을 묶은 법률상 약칭) 조항을 이렇게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인공지능 안전성·신뢰성 검·인증 및 영향평가에 대한 지원을 하고…”1

그때는 이 문장을 “법이 스스로 규제 조항을 진흥 언어로 번역한 사례”로 읽고 지나갔다.

이번 글에서 그 문장을 다시 펼친다.
정말로 “자율”이기만 한지, 조문을 끝까지 따라가 본다.


법이 잠그는 문, 돈이 여는 문

시장에 문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문을 여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법이 잠그는 문이다.
열쇠(인증)가 없으면 문 자체가 안 열린다. 예외가 없다. EU AI Act가 이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돈이 여는 문이다.
열쇠가 없어도 문은 열린다. 다만 문 안쪽 특정 구역(공공조달)에는 들어갈 수 없다. 한국 AI 기본법이 이 방식에 가깝다.

두 문 다 “인증 없이는 어렵다”는 압력을 준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압력이 걸리는 범위가 다르다. 조문으로 확인해보자.


세 조문이 만드는 하나의 경로

한국 쪽 장치는 조문 하나가 아니라 세 조문이 이어진 경로다.

  1. 제30조 검·인증 지원 — 국가는 민간 자율 검·인증 활동을 지원한다(제1항). 고영향 AI 제공 시 사전 검·인증은 노력 의무다(제3항).
    그런데 제4항이 갈림길이다 — 국가기관등이 고영향 AI를 이용할 때는 검·인증 받은 것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2

  2. 시행령 제15조④⑤ 국가기관등 우선구매 — 법 제16조제3항의 위임을 받아, “과기정통부장관이 확인한 제품·서비스”를 우선구매 대상으로 정한다.
    확인 기준·절차는 행정안전부와 협의해 별도 고시로 정한다 — 2026년 7월 20일 신설됐고, 그 고시도 나왔다.3

  3. 제35조 영향평가 — 역시 노력 의무이지만, 국가기관등은 영향평가를 실시한 제품·서비스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4

세 조문을 한 문장으로 이으면 이렇다. “검·인증도 영향평가도 법적으로는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안 하면, 정부에는 못 판다.”

여기서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왜 하필 이 둘만 노력 의무인가.

같은 법의 제31조(투명성)·제32조(프론티어 안전성)·제34조(고영향 사업자 6책무)·제36조(국내대리인)는 모두 “이행하여야 한다”는 의무다. 어기면 사실조사와 시정명령이 오고 과태료가 붙는다.5
노력 의무로 남은 것은 제30조제3항 검·인증과 제35조 영향평가, 딱 둘이다.

둘 다 시장에 내놓기 전에 제3자가 확인하는 절차다.

한국법은 의무 전반을 피하지 않았다.
사전 관문 하나를 피했다.


EU는 문 전체를 잠근다

EU AI Act의 대응 장치는 구조가 다르다.
Art.40은 조화표준을 지키면 요건 준수를 추정해주고,
Art.43은 고위험 AI에 강제 적합성평가를 요구한다.
통과하지 못하면 CE 마킹을 달 수 없고,
CE 마킹이 없으면 EU 역내 시장 어디에도 낼 수 없다.6

공공기관에 팔든, 개인 소비자에게 팔든, 국경을 넘는 순간 같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시장 전체가 하나의 문이다.

한국의 문은 다르다.
검·인증이 없어도 민간 시장에는 자유롭게 팔 수 있다. 문이 잠기는 곳은 공공조달이라는 한 구역뿐이다.


지렛대의 크기

“공공조달 구역 하나뿐”이라고 해서 이 장치가 약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정부는 작은 구매자가 아니다.

특히 지금 한국은 “정부 AI 전환”이 정책의 실질 동력으로 떠오르는 국면이다. 시행령 개정에서 행정안전부가 학습용데이터·기술도입지원·우선구매 확인 고시에 공동 주체로 새로 등장한 것이 그 신호다.7 공공부문이 AI를 대규모로 도입하려는 참이라면, “정부에 팔 자격”은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다. 오히려 검·인증 없이는 이 성장하는 시장 전체에서 배제된다는 뜻이 된다.

법적으로는 자율, 시장 구조상으로는 사실상의 게이트. 이것이 “자율의 얼굴을 한 규제”라는 이름의 의미다.

그 자율의 공백을 메우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산·학·연 협의체가 자체적으로 통합 검·인증 체계를 준비 중이고, 2026년 7월부터 시범 인증에 들어갔다.8
국가가 강제하지 않은 자리를, 민간이 스스로 정리하려는 참이다.


[필자 분석] 강제하지 않고 유도하는 설계

이 설계를 “무늬만 자율”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다른 종류의 정책 도구로 읽는 편이 맞다.

법으로 강제하면 산업 육성법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E-3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 지렛대도 없으면 검·인증 참여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이 택한 길은 법적 강제 대신 시장의 지렛대다.
국가가 스스로 구매자가 되어, 구매 조건으로 검·인증을 요구한다.
강제가 아니라 유인이다. 진흥법의 문법 안에서도 작동하는 규제 효과를 설계한 셈이다 — E-3의 “금지는 진흥법의 문법이 아니다”라는 진단에 대한, 한국식 우회 해법이기도 하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 단어 자체에 답이 들어 있다.
법은 이 활동을 “검증ㆍ인증 활동”이라 부르고, 그것을 “검·인증등”으로 줄였다. 인증과 검증을 나란히 놓은 것이다.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인증은 이미 정해진 규격이 잣대다. 검증은 그 규격이 없을 때, 만든 측이 내걸었던 주장을 잣대로 삼는다.

EU가 문을 잠글 수 있는 이유는 조화표준이 그 잣대를 미리 깔아두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아직 그 잣대가 없다. 잣대가 없으면 무엇을 강제할지부터 특정할 수 없다.
그래서 검증을 함께 묶었고, 강제 대신 유인을 택했다. 검·인증이라는 합성어는 편의상의 축약이 아니라, 규격이 아직 없다는 상태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설계에는 EU식 문과 다른 근본적 한계가 있다.
사정거리가 공공조달에서 멈춘다. 순수 민간시장을 겨냥한 AI, 해외 소비자를 겨냥한 AI, 정부와 거래가 없는 스타트업의 AI는 이 지렛대의 사정권 밖에 있다. EU의 문은 시장 전체를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지만, 한국의 문은 정부라는 한 구역의 검문소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장치의 무게가 정해졌다.
우선구매의 실제 기준을 정할 고시가 시행령과 같은 날 나왔다.3 “느슨하면 상징, 촘촘하면 국가 인증제”라고 앞서 던졌던 갈림길은, 고시를 읽어 보니 둘 중 하나로 떨어지지 않는다. 촘촘하되, 안전성이 아닌 다른 것을 촘촘히 잰다.

고시가 확인기관에 요구하는 심사 기준은 일곱 가지다.9 전부 한 질문으로 수렴한다.
이 제품에 정말 AI 연산체계가 들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가.
학습·추론의 특성을 갖췄는가, 입력이 그 체계를 거쳐 의미 있는 출력을 내는가, 정상 동작하는가. 정확도나 공정성, 안전성, 견고성을 묻는 기준은 하나도 없다.

즉 이 관문이 막으려는 것은 위험한 AI가 아니라 가짜 AI다.
”우리 제품은 AI 기반입니다”라고 말해 놓고 실제로는 규칙 기반 자동화에 불과한 경우, 조달 우대를 받지 못하도록 걸러내는 장치에 가깝다.

확인은 부처가 직접 하지 않는다. 확인기관(한국인공지능진흥협회)이 신청을 받고, 심사기관(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이 기술 심사를 맡는 이원 구조다. 국가가 기관을 지정해 심사를 위임하는 형태는 A-3에서 본 유럽의 검증기관(Notified Body) 배치와 겉모습이 닮았다.
그러나 유럽의 검증기관은 안전한가를 묻고, 이 확인기관은 진짜인가를 묻는다.

“국가 인증제에 가까워지는가”라는 질문은 절반만 맞는 질문이었다. 문턱은 촘촘해졌지만, 그 촘촘함이 향한 곳은 안전성이 아니라 진위 여부다.


마무리: 두 개의 문, 두 개의 사정거리

법이 잠그는 문과 돈이 여는 문.
어느 쪽이 더 “규제”에 가까운가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그 문이 얼마나 넓은 시장을 지키고 있는가.

한줄 코멘트.

“민간 자율”이라는 이름 뒤에서, 조달이라는 지렛대가 조용히 규제의 일을 하고 있다.
다만 그 지렛대가 닿는 범위는 정부라는 한 구역이고, 그 저울이 재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진위다.

이 조달의 지렛대는 결국 “얼마나 큰 AI를 얼마나 무겁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만난다.

다음 글에서는 규모 그 자체가 규제의 문턱이 되는 지점 — 프론티어 모델의 연산량 기준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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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인공지능기본법 원 제정(법률 제20676호, 2025-01-21) 제정이유 주요내용 (자)항. E-1에서 최초 인용.

  2. 인공지능기본법 제30조 — 제1항(검·인증 지원)·제3항(고영향 AI 사전 검·인증 노력 의무)·제4항(국가기관등 이용 시 검·인증 우선 고려). “검·인증등”은 제1항이 만든 법률상 정의어다 —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검증ㆍ인증 활동(이하 “검ㆍ인증등”이라 한다)”. 한국어 “검증”에는 영어 두 단어가 겹쳐 있는데, verification은 명세된 요구사항을 충족했는지(“제대로 만들었는가”), validation은 의도한 사용 목적을 충족했는지(“맞는 것을 만들었는가”)를 묻는다. EU에서 verification은 인증과 나란한 별개 활동이 아니라 적합성평가 모듈의 이름이다(Module F·F1 product verification, G unit verification). 상세는 위키 개념 문서 검증과-인증 참조.

  3. 인공지능기본법 시행령 제15조④제1호·⑤(2026.7.20 신설) — 법 제16조제3항 국가기관등 우선구매 대상은 과기정통부장관 확인 제품·서비스, 확인 기준·절차는 행정안전부 협의 고시로 위임. 위임을 받아 「인공지능제품·서비스 확인 절차 운영에 관한 고시」(과학기술정보통신부고시 제2026-50호)가 2026-07-21 제정·시행됐다. 확인기관은 한국인공지능진흥협회(법 제26조①), 심사기관은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제34조). 상세는 한국-AI기본법-시행령36506호·인공지능제품서비스확인절차고시 참조. 2

  4. 인공지능기본법 제35조 — 영향평가는 노력 의무(제1항), 국가기관등은 영향평가 실시 제품·서비스 우선 고려(제3항 취지).

  5. 의무/노력의무 스펙트럼 — 의무(“이행하여야 한다” 등): 제31조 투명성·제32조 프론티어 안전성·제34조 고영향 사업자 6책무·제36조 국내대리인. 위반 시 제40조 사실조사·중지·시정명령과 제43조 과태료(상한 3천만원)로 연결된다. 노력 의무: 제30조제3항·제35조제1항 둘뿐이다. 2026-08-04 법제처 국가법령정보 목차 대조.

  6. EU AI Act Article 40(조화표준 준수추정)·Article 43(적합성평가 절차, 미이행 시 CE 마킹·시장출시 불가).

  7. 인공지능기본법 시행령 제13조③·제15조②③⑤(행정안전부 공동 주체 신설, 2026.7.20). 상세는 한국-AI기본법-시행령36506호 §“행정안전부의 등장” 참조.

  8. 서울경제, “제각각 AI 안전성 검·인증…연내 통합체계 나온다”, 2026-07-28. 산·학·연 협의체 “AI 신뢰성 얼라이언스”가 2026년 7월부터 6개 기업 대상 시범인증에 착수, 2026년 12월 본격 시행을 목표로 함. 기존 국내 검·인증 제도는 TTA·KTL·KSA 등 7개 이상 난립. NIA 채은선, “인공지능기본법의 주요 내용” 세미나(2026-08-06) 인용. 상세는 위키 검증과-인증 §6 참조.

  9. 「인공지능제품·서비스 확인 절차 운영에 관한 고시」 제5조② — 확인기준 7개: ①인공지능처리 연산체계 적용 ②학습·추론 등 인공지능 특성 ③입력이 그 체계를 거쳐 유의미한 결과 출력 ④구조도상 위치 명확 및 구동 체계 결합 동작 ⑤기능·편의성·접근성·효율성 등에 활용 확인 가능 ⑥주요 기능 정상 동작 ⑦외부 연동 시 호출 로그·API 키 확인 가능. 처리기간은 접수 후 15일(30일 범위 내 1회 연장 가능). 신청 전 조달청 목록정보시스템(g2b) 물품목록번호 사전 확보 의무(제4조②). 거짓·부정 확인은 취소 사유(제8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