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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E. 두 개의 AI법: 인공지능기본법 vs EU AI Act : 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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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하나의 함정

10^25와 10^26. 자릿수 하나 차이다.

눈으로 보면 사소해 보인다. 25와 26. 하나 늘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10^25는 1 뒤에 0이 25개, 10^26은 1 뒤에 0이 26개다. 후자는 전자의 정확히 10배다. 100원과 1,000원의 차이가 숫자 하나로 표기되는 것과 같다.

한국과 EU가 “이 AI는 특별히 감시해야 한다”고 선을 긋는 지점이, 바로 이 자릿수 하나의 간극 위에 있다.


같은 모델, 다른 신분

한국 AI 기본법 제32조는 누적 연산량이 대통령령 기준 이상인 AI 시스템에 별도 의무를 부과한다.[^1] 시행령 제24조가 정한 그 기준이 10^26 FLOPs다.

EU AI Act Art.51은 10^25 FLOPs를 시스템적 위험(systemic risk)의 추정 기준으로 삼는다.[^2]

10배의 간극. 이 간극 사이에 실제로 걸리는 모델들이 있다. 2026년 시점 GPT-4급 모델의 훈련 연산량은 대략 2×10^25 FLOPs 안팎으로 추정된다.[^3] 이 모델은 EU 기준은 넘지만 한국 기준에는 못 미친다. 같은 모델이 국경을 넘는 순간 신분이 바뀐다 — 유럽에서는 특별 감시 대상, 한국에서는 평범한 AI.

Claude Opus급·GPT-5급처럼 더 큰 모델은 두 기준을 모두 넘는다. 문턱의 차이가 실제로 체감되는 구간은, 정확히 두 자릿수 사이에 낀 모델들이다.


문턱을 넘은 뒤, 무엇을 하는가

문턱의 위치만 다른 게 아니다. 문턱을 넘은 뒤 요구받는 것의 구체성도 다르다.

한국 제32조는 두 가지를 요구한다.[^4]

  1. 수명주기 전반에 걸친 위험 식별·평가·완화
  2. 안전사고 모니터링·대응 위험관리체계 구축

그리고 과기정통부에 이행 결과를 제출한다. 구체적인 이행 방식은 고시로 정한다 —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의 세부가 아직 확정 전이다.

EU Art.51-55는 항목을 훨씬 촘촘하게 나열한다.[^5]

  1. 시스템적 위험 평가(모델 자체의 위험 특성 분석)
  2. 적대적 테스트(adversarial testing) — 실제로 공격을 가해보고 취약점을 찾는 절차
  3. 중대 사고 보고 — 정해진 시한 안에 AI Office와 회원국 당국에 보고
  4. 사이버보안 요건
  5. GPAI Code of Practice — 위 의무들의 표준 이행 경로. 형식은 자율 서명이지만, 서명하면 준수로 추정되고 서명하지 않으면 개별 입증 부담을 진다.

한국의 두 항목은 목표를 제시하는 선언형이다. EU의 목록은 구체적 절차를 요구하는 체크리스트형이다. E-2에서 확인한 “영향(선언적 언어) 대 위험(계산·검증 가능한 언어)”의 구도가, 프론티어 모델 앞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자율이라는 이름의 재등장

5번, GPAI Code of Practice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형식은 자율 서명이다. 법이 강제하는 문서가 아니다.

그런데 서명하지 않은 공급자는 Art.53-55 의무를 각자 개별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서명한 공급자는 그 부담 없이 준수로 추정받는다. 자율이라는 형식이 실질적인 유인 구조를 통해 사실상의 표준 경로가 되는 것이다.

이 패턴이 낯설지 않다. E-5에서 본 한국의 검·인증 구조와 정확히 같은 문법이다. 법적으로는 자율, 실질적으로는 경로를 하나로 몰아가는 지렛대. 다만 지렛대의 위치가 다르다. 한국은 공공조달이라는 시장의 힘을 지렛대로 쓰고, EU는 입증 부담의 비대칭을 지렛대로 쓴다. “자율의 얼굴을 한 사실상의 규제”는 한국만의 발명품이 아니라, 두 법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쓰는 공통 기법이었다.


[필자 분석] 관대함은 고정되지 않는다

10^26이라는 숫자를 “한국이 산업을 보호하려 정한 여유로운 기준”으로 읽기 쉽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빠져 있다.

연산량 기준은 정적인 숫자다. 그런데 컴퓨팅 비용은 정적이지 않다. 하드웨어가 발전할수록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연산을 살 수 있다. 오늘 10^26 FLOPs를 훈련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몇 년 뒤에는 지금보다 훨씬 적은 자본으로 같은 연산량에 도달할 수 있다. 즉 문턱의 절대 위치는 고정돼 있어도, 그 문턱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진입장벽은 계속 낮아진다. 오늘의 “관대한 기준”이 몇 년 뒤에는 “웬만한 스타트업도 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 시행령 제33조가 이 문제를 의식한 흔적이 있다. 프론티어 기준을 포함한 규제 전반을 3년마다 재검토하도록 정해 뒀다.[^6] 정적인 숫자를 동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장치다. 문제는 재검토의 결과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 기준을 EU 쪽으로 좁힐 수도, 산업 보호 논리로 그대로 둘 수도 있다.

프론티어 문턱 비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지금 몇 배 차이인가”가 아니라 “이 숫자가 시간이 지나도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인가”다. E-2에서 본 “영향과 위험”의 언어 차이, E-5에서 본 “자율의 얼굴을 한 규제”라는 공통 기법 — 이 모든 것 위에, 프론티어 규제는 세 번째 층을 하나 더 얹는다. 숫자로 그은 선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 선이 가리키는 실제 위치는 기술이 움직이는 만큼 함께 움직인다.


마무리: 자릿수 하나가 가리키는 것

10^25와 10^26. 자릿수 하나의 차이가 오늘은 몇 개의 모델을 가르는 선이지만, 내일은 훨씬 많은 모델을 가르는 선이 될 수 있다.

한줄 코멘트. 프론티어의 문턱은 숫자로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술이 밀어붙이는 만큼 계속 움직이는 문이다. 정적인 법이 동적인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문턱 자체보다 문턱을 다시 그을 수 있는 장치가 더 중요하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문턱을 넘었는데도 의무를 어겼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다음 글에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질문 — 제재의 무게와, 두 법이 같은 여름에 교차하며 만드는 일정의 역설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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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1]: 인공지능기본법 제32조(인공지능 안전성 확보 의무) + 시행령 제24조(프론티어 AI 연산량 기준 10^26 FLOPs + 최첨단 기술 + 광범위·중대 위험 3요건). 상세는 [[한국AI기본법-EU-AI-Act-조문대응]] §5 참조. [^2]: EU AI Act Article 51(2) — 훈련 연산량 10^25 FLOPs 초과 시 시스템적 위험(systemic risk) 추정. 집행위 직권·과학패널 경보로 추가 지정도 가능. [^3]: [검토 필요] 개별 모델의 정확한 훈련 연산량은 각 개발사가 공식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외부 추정치이며, 본 시리즈에서 1차 소스로 검증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두 문턱 사이에 실제로 걸리는 모델군이 존재한다는 구조적 사실을 보이기 위한 근사치로만 인용한다. [^4]: 인공지능기본법 제32조제1항 1·2호(위험 식별·평가·완화, 위험관리체계 구축) + 과기정통부 이행결과 제출 의무. 구체 이행 방식은 고시 위임. [^5]: EU AI Act Article 51(시스템적 위험 추정)·Article 55(시스템적 위험 GPAI 추가 의무: 모델평가·적대적테스트·사이버보안·중대사고보고)·Article 56(Codes of Practice). GPAI Code of Practice 2025.7.10 최종본. 상세는 [[GPAI-Code-of-Practice]] 참조. [^6]: 인공지능기본법 시행령 제33조(규제 재검토) — 2026.1.1 기준 3년 주기, 10^26 FLOPs 프론티어 기준 포함. 상세는 [[한국-AI기본법-시행령36053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