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4] AI가 만든 것임을 밝히는 두 가지 방식 — 사람에게 말하기, 기계에게 새기기
Series E. 두 개의 AI법: 인공지능기본법 vs EU AI Act : 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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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장을 다르게 새기다
두 나라의 국회가 같은 문장을 통과시켰다고 하자.
“AI가 만든 것임을 밝혀야 한다.”
한 나라는 이 문장을 말로 알리라는 뜻으로 새겼다. 다른 나라는 이 문장을 기계가 읽을 수 있게 새기라는 뜻으로 새겼다.
말과 새김. 둘 다 “밝힌다”는 행위이지만, 수신자가 다르다. 하나는 사람의 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기계의 눈을 향한다.
한국 AI 기본법 제31조와 EU AI Act Article 50이 정확히 이 갈림길에 서 있다.
다섯 항목, 세 개의 대응
Art.50은 다섯 개 항으로 나뉜다.[^1] 하나씩 한국 제31조와 맞대본다.
- Art.50(1) — AI와 대화 중임을 인식 가능하게 설계. 챗봇·음성봇에 적용. 한국 제31조제1항의 사전 고지 의무가 여기 대응한다.
- Art.50(2) — AI 생성 콘텐츠에 기계판독 가능한 표시. 한국 제31조제2항의 생성물 표시 의무가 대응한다. 단, 뒤에서 보듯 대응의 “깊이”가 다르다.
- Art.50(3) — 감정인식·생체분류 AI, 당사자에게 고지. 한국에는 이 항에 대응하는 조문이 없다.
- Art.50(4) — 딥페이크, AI 생성·조작 사실을 명확히 고지. 한국 제31조제3항의 딥페이크 표시 의무가 대응한다.
- Art.50(5) — 공익 관련 AI 생성 텍스트, AI 생성 사실 고지. 한국에는 이 항에 대응하는 조문이 없다.
세 항목은 대응하고, 두 항목은 한국에 아예 없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지점은 “대응하는” 세 항목 안에 있다. 특히 두 번째 항목, Art.50(2)다.
말로 알리기 vs 기계가 읽게 새기기
제31조제2항은 “생성형 AI 결과물임을 표시해야 한다”고 정한다. 시행령 제23조제2항은 그 표시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를 골라도 되고, 안내 문구만으로도 된다.[^2]
Art.50(2)는 다르다. “기계판독 가능한(machine-readable) 형식”으로 표시하라고 명시한다. 사람이 눈으로 읽는 안내 문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자동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신호여야 한다. C2PA(콘텐츠 출처 표준)나 워터마크, 디지털서명 같은 기술이 이 요건을 채운다.[^3]
비유하자면 이렇다. 제품에 “이 옷은 면 100%입니다”라는 종이 택을 다는 것과, 옷감 안에 RFID 칩을 심어 스캐너를 대면 자동으로 성분이 뜨게 만드는 것. 둘 다 “성분을 표시”하는 행위이지만, 사람이 택을 직접 읽어야 하는 것과 기계가 자동으로 읽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표시다.
Art.50(2)의 원래 적용일은 2026년 8월 2일이었으나, Omnibus VII 협상으로 조정됐다. 2026년 8월 2일 이전에 이미 출시된 시스템은 2026년 12월 2일까지 준수하면 되는 경과조치를 받는다. 그러나 8월 2일 이후에 새로 출시되는 시스템에는 유예가 없다 — 즉시 적용이다.[^4] 언뜻 “4개월 미뤄졌다”로 읽히기 쉽지만, 실제로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유예일 뿐 신규 시스템은 그대로 정면으로 맞는다.
사람이 옮기는 콘텐츠, 기계가 옮기는 콘텐츠
왜 이 차이가 중요한가.
콘텐츠가 처음 만들어진 자리에만 머무른다면, 안내 문구로 충분하다. 사람이 그 화면을 보고 “아, AI가 만든 거구나”를 안다.
그러나 콘텐츠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캡처되고, 잘리고, 다른 플랫폼에 재업로드되고, 또 다른 AI의 학습 데이터로 흘러 들어간다. 이 이동의 대부분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처리한다. 플랫폼의 필터링 알고리즘, 검색엔진의 색인 시스템, 다음 세대 모델의 데이터 파이프라인 — 이들은 화면에 적힌 안내 문구를 “읽지” 못한다. 이미지 파일에 박힌 신호만 읽을 수 있다.
안내 문구는 콘텐츠가 원래 자리에 있을 때만 작동하는 표시다. 기계판독 신호는 콘텐츠가 어디로 옮겨가도 따라붙는 표시다. 둘의 실효 범위는 처음부터 다르게 설계돼 있었다.
[필자 분석] 누구에게 말을 거는 법인가
E-1에서 확인한 두 법의 출생증명서, E-2에서 확인한 “영향”과 “위험”의 언어 차이가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한국 제31조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조문이다. “AI가 결정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행위다. 진흥법의 문법 안에서 투명성은 “정직하게 밝히기”로 충분히 완성된다.
Art.50(2)는 기계에게도 말을 거는 조문이다. EU는 콘텐츠가 인간의 눈을 거치지 않고도 자동화된 생태계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래서 사람이 읽는 안내문과 별개로, 기계가 검증할 수 있는 신호를 요구한다. 이것은 계산 가능한 “위험”을 다루던 언어의 연장선이다 — 검증 가능하지 않은 표시는 집행할 수 없고, 집행할 수 없는 의무는 사실상 선언에 그친다는 판단이다.
이 격차는 실무적으로도 크다. 워터마킹·C2PA 같은 기술 표준을 구현하려면 상당한 엔지니어링 투자가 필요하다. 안내 문구 삽입은 UI 문구 하나 추가하는 일이다. 한국 기업이 국내 시장만 본다면 이 격차를 못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콘텐츠를 생성하는 AI 서비스가 국경을 넘는 순간 — 사용자가 그 이미지를 캡처해 해외 플랫폼에 올리는 순간 — 기계판독 신호가 없는 콘텐츠는 EU 기준에서 추적 불가능한 익명의 합성물이 된다.
Art.50(3)·(5)의 공백(감정인식 고지, 공익 텍스트 고지)도 같은 결을 갖는다. 둘 다 “당사자가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겨냥한다. 사람이 스스로 알아차릴 수 없는 곳까지 법이 따라가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 — 이 역시 진흥법의 자연스러운 사정거리 밖에 있다.
마무리: 밝힌다는 것의 두 얼굴
같은 동사, “밝히다”를 두 법이 함께 쓴다.
하나는 그 동사를 사람 앞에서 완성한다. 다른 하나는 그 동사를 기계 앞에서도 완성해야 끝난다고 본다.
한줄 코멘트. 투명성 의무의 진짜 격차는 “밝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밝히는가”다. 사람에게만 말을 거는 법은, 콘텐츠가 사람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투명성과 검증에는 또 다른 층이 있다. 스스로 밝히는 것과, 남이 확인해주는 것은 다르다. 다음 글에서 “자율”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실은 사실상의 규제로 작동하는 장치 — 검·인증과 우선구매 — 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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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1]: EU AI Act Article 50(1)-(5). 상세는 [[EU-AI-Act-Article-50]] 참조. [^2]: 인공지능기본법 제31조제2항 + 시행령 제23조제2항. 2호 방식(기계판독 가능한 방법) 또는 1회 이상 안내 문구 병행 중 선택 가능. 상세는 [[한국AI기본법-EU-AI-Act-조문대응]] §4 참조. [^3]: AI Act Article 50(2). 워터마크·메타데이터·디지털서명 등 C2PA(Coalition for Content Provenance and Authenticity) 계열 기술표준이 이행 수단으로 논의됨. 상세는 [[AI-생성콘텐츠-표시라벨링]] 참조. [^4]: Digital Omnibus, 신 Article 111(2) 4항(Position Art.1(39)(b)) — “2026.8.2 이전에 이미 시장에 출시된 합성콘텐츠 생성 AI 시스템의 공급자는 2026.12.2까지 Art.50(2)를 준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기존 출시 시스템만 경과조치 대상이며 신규 출시 시스템은 유예 없음. 상세는 [[Digital-Omnibus-Omnibus-VII]]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