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5] 자율의 얼굴을 한 규제 — 검·인증과 우선구매
Series E. 두 개의 AI법: 인공지능기본법 vs EU AI Act : 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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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펼치는 그 문장
E-1에서 한 문장을 인용했다. 한국 AI 기본법의 제정이유서가 검·인증 조항을 이렇게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인공지능 안전성·신뢰성 검·인증 및 영향평가에 대한 지원을 하고…”[^1]
그때는 이 문장을 “법이 스스로 규제 조항을 진흥 언어로 번역한 사례”로 읽고 지나갔다. 이번 글에서 그 문장을 다시 펼친다. 정말로 “자율”이기만 한지, 조문을 끝까지 따라가 본다.
법이 잠그는 문, 돈이 여는 문
시장에 문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문을 여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법이 잠그는 문이다. 열쇠(인증)가 없으면 문 자체가 안 열린다. 예외가 없다. EU AI Act가 이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돈이 여는 문이다. 열쇠가 없어도 문은 열린다. 다만 문 안쪽 특정 구역(공공조달)에는 들어갈 수 없다. 한국 AI 기본법이 이 방식에 가깝다.
두 문 다 “인증 없이는 어렵다”는 압력을 준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압력이 걸리는 범위가 다르다. 조문으로 확인해보자.
세 조문이 만드는 하나의 경로
한국 쪽 장치는 조문 하나가 아니라 세 조문이 이어진 경로다.
- 제30조 검·인증 지원 — 국가는 민간 자율 검·인증 활동을 지원한다(제1항). 고영향 AI 제공 시 사전 검·인증은 노력 의무다(제3항). 그런데 제4항이 갈림길이다 — 국가기관등이 고영향 AI를 이용할 때는 검·인증 받은 것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2]
- 시행령 제15조④⑤ 국가기관등 우선구매 — 법 제16조제3항의 위임을 받아, “과기정통부장관이 확인한 제품·서비스”를 우선구매 대상으로 정한다. 확인 기준·절차는 행정안전부와 협의해 별도 고시로 정한다 — 2026년 7월 20일 신설됐지만, 그 고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3]
- 제35조 영향평가 — 역시 노력 의무이지만, 국가기관등은 영향평가를 실시한 제품·서비스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4]
세 조문을 한 문장으로 이으면 이렇다. “검·인증도 영향평가도 법적으로는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안 하면, 정부에는 못 판다.”
EU는 문 전체를 잠근다
EU AI Act의 대응 장치는 구조가 다르다. Art.40은 조화표준을 지키면 요건 준수를 추정해주고, Art.43은 고위험 AI에 강제 적합성평가를 요구한다. 통과하지 못하면 CE 마킹을 달 수 없고, CE 마킹이 없으면 EU 역내 시장 어디에도 낼 수 없다.[^5]
공공기관에 팔든, 개인 소비자에게 팔든, 국경을 넘는 순간 같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시장 전체가 하나의 문이다.
한국의 문은 다르다. 검·인증이 없어도 민간 시장에는 자유롭게 팔 수 있다. 문이 잠기는 곳은 공공조달이라는 한 구역뿐이다.
지렛대의 크기
“공공조달 구역 하나뿐”이라고 해서 이 장치가 약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정부는 작은 구매자가 아니다.
특히 지금 한국은 “정부 AI 전환”이 정책의 실질 동력으로 떠오르는 국면이다. 시행령 개정에서 행정안전부가 학습용데이터·기술도입지원·우선구매 확인 고시에 공동 주체로 새로 등장한 것이 그 신호다.[^6] 공공부문이 AI를 대규모로 도입하려는 참이라면, “정부에 팔 자격”은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다. 오히려 검·인증 없이는 이 성장하는 시장 전체에서 배제된다는 뜻이 된다.
법적으로는 자율, 시장 구조상으로는 사실상의 게이트. 이것이 “자율의 얼굴을 한 규제”라는 이름의 의미다.
[필자 분석] 강제하지 않고 유도하는 설계
이 설계를 “무늬만 자율”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다른 종류의 정책 도구로 읽는 편이 맞다.
법으로 강제하면 산업 육성법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E-3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 지렛대도 없으면 검·인증 참여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이 택한 길은 법적 강제 대신 시장의 지렛대다. 국가가 스스로 구매자가 되어, 구매 조건으로 검·인증을 요구한다. 강제가 아니라 유인이다. 진흥법의 문법 안에서도 작동하는 규제 효과를 설계한 셈이다 — E-3의 “금지는 진흥법의 문법이 아니다”라는 진단에 대한, 한국식 우회 해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설계에는 EU식 문과 다른 근본적 한계가 있다. 사정거리가 공공조달에서 멈춘다. 순수 민간시장을 겨냥한 AI, 해외 소비자를 겨냥한 AI, 정부와 거래가 없는 스타트업의 AI는 이 지렛대의 사정권 밖에 있다. EU의 문은 시장 전체를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지만, 한국의 문은 정부라는 한 구역의 검문소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장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선구매의 실제 기준을 정할 고시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지렛대는 조문상으로는 이미 만들어졌지만, 그 지렛대가 실제로 얼마나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지는 이 고시 하나에 달려 있다. 기준이 느슨하면 지렛대는 상징에 그치고, 기준이 촘촘하면 사실상의 국가 인증제에 가까워진다. 조문은 확정됐지만, 그 조문의 실효성은 아직 고시 대기 중이다 —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 강조해온 구분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무리: 두 개의 문, 두 개의 사정거리
법이 잠그는 문과 돈이 여는 문. 어느 쪽이 더 “규제”에 가까운가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그 문이 얼마나 넓은 시장을 지키고 있는가.
한줄 코멘트. “민간 자율”이라는 이름 뒤에서, 조달이라는 지렛대가 조용히 규제의 일을 하고 있다. 다만 그 지렛대가 닿는 범위는 정부라는 한 구역이고, 그 무게는 아직 고시되지 않았다.
이 조달의 지렛대는 결국 “얼마나 큰 AI를 얼마나 무겁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만난다. 다음 글에서는 규모 그 자체가 규제의 문턱이 되는 지점 — 프론티어 모델의 연산량 기준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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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1]: 인공지능기본법 원 제정(법률 제20676호, 2025-01-21) 제정이유 주요내용 (자)항. E-1에서 최초 인용. [^2]: 인공지능기본법 제30조 — 제1항(검·인증 지원)·제3항(고영향 AI 사전 검·인증 노력 의무)·제4항(국가기관등 이용 시 검·인증 우선 고려). [^3]: 인공지능기본법 시행령 제15조④⑤(2026.7.20 신설) — 법 제16조제3항 국가기관등 우선구매 대상은 과기정통부장관 확인 제품·서비스, 확인 기준·절차는 행정안전부 협의 고시로 위임. 2026.7.25 현재 고시 미제정. 상세는 [[한국-AI기본법-시행령36506호]] 참조. [^4]: 인공지능기본법 제35조 — 영향평가는 노력 의무(제1항), 국가기관등은 영향평가 실시 제품·서비스 우선 고려(제3항 취지). [^5]: EU AI Act Article 40(조화표준 준수추정)·Article 43(적합성평가 절차, 미이행 시 CE 마킹·시장출시 불가). [^6]: 인공지능기본법 시행령 제13조③·제15조②③⑤(행정안전부 공동 주체 신설, 2026.7.20). 상세는 [[한국-AI기본법-시행령36506호]] §”행정안전부의 등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