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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페이지 안에 담긴 EU 제품규제의 전체 지도

*Series A. EU 제품안전 기초: NLF를 해부한다 A-4 보충편 (A-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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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리즈 전체에서 반복 인용된 Blue Guide(블루 가이드)의 정체를 밝힌다. 법령인가, 해설서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새 도시에 처음 갔을 때를 떠올려 보자.

지하철 노선도, 도로 표지판, 관광 안내 지도 — 어느 것도 그 도시의 법률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그 도시에서 움직일 수 없다. 법률이 도시의 규칙이라면, 지도는 그 규칙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려주는 도구다.

EU 제품규제라는 도시에서, 그 지도 역할을 하는 문서가 하나 있다.

Blue Guide(블루 가이드).

A 시리즈 전체에서 우리는 이 문서를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Old Approach의 역사(A-1)도, 모듈 시스템의 설계(A-2)도, NB의 독립성 요건(A-3)도, 시장감시 체계(A-4)도 — 핵심 근거는 대부분 Blue Guide에서 왔다.

이제 이 문서 자체를 들여다볼 차례다.


Blue Guide는 무엇인가

정식 명칭은 이렇다.

“The ‘Blue Guide’ on the implementation of EU product rules 2022” — EU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가 발행한 공식 문서로, EU 관보(Official Journal)에 Commission Notice(위원회 공고)로 게재되었다. 현재 유효한 버전은 2022년 6월 29일자(OJ C 247)다.¹

120여 페이지에 걸쳐, EU 조화 입법(Union harmonisation legislation) 하에서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법인가, 해설서인가

Blue Guide는 법령이 아니다.

EU 규정(Regulation)이나 지침(Directive)처럼 법적 구속력을 가진 문서가 아니다. Commission Notice, 즉 위원회의 “공고”다. 법원에서 재판할 때 Blue Guide 조항을 직접 인용해 판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참고 자료도 아니다.

EU 집행위원회가 공식 발행하고, EU 관보에 게재했다. EU 기관 3자(집행위·이사회·의회)가 NLF 체계를 설계할 때 공통으로 참조하는 문서다. 각국 시장감시 당국, 인정기구, NB가 실무에서 따르는 기준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헌법이 있고, 법률이 있다. 그 아래 시행령이 있고, 시행규칙이 있다. Blue Guide는 이 계층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무자가 매일 펼치는 문서는 법전이 아니라 Blue Guide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법제처의 “법령해석 사례집”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리의 해석 사례집은 개별 질의에 대한 답변 모음이다. Blue Guide는 체계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설명하는 종합 해설서다.


Blue Guide 안에 무엇이 있는가

120여 페이지의 구성은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이다. A 시리즈에서 다룬 주제가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함께 보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Chapter 1 — 역사와 체계. Old Approach에서 NLF까지의 진화. A-1과 A-1-1에서 다룬 내용의 원전이다. NLF의 세 법령(Decision 768/2008, Regulation 765/2008, Regulation 764/2008)의 관계, 일반제품안전지침(GPSD), 제조물책임법과의 관계까지 포함한다.

Chapter 2 — 적용 범위. 어떤 제품이 EU 조화 입법의 대상인가. “제품”의 정의, “시장 출시(placing on the market)”의 정확한 의미, 온라인 판매와 EU 역외 제조사에 대한 규칙.

Chapter 3 — 경제 주체. 제조사, 수입자, 유통업자, 수권대리인 각각의 법적 의무. 누가 어디까지 책임지는가.

Chapter 4 — 제품 요건. 필수 요구사항(Essential Requirements)의 설계 원리, 조화 표준과 적합성 추정, 기술 문서(Technical Documentation), EU 적합성 선언(DoC), CE 마킹 규칙.

Chapter 5 — 적합성 평가. 모듈 A~H의 상세 설명, NB의 역할·독립성·역량 요건, 통보(Notification) 절차, NANDO. A-2, A-3, A-3-1에서 다룬 내용의 원전이다.

Chapter 6 — 인정(Accreditation). 왜 인정이 필요한가, 인정의 정의, 국가인정기구, EA, 동료 평가. A-3-1에서 다룬 신뢰의 사슬의 원전이다.

Chapter 7 — 시장감시. Regulation 2019/1020의 상세 해설, MSA의 권한, 시정 조치, RAPEX/Safety Gate. A-4에서 다룬 내용의 원전이다.

Chapter 8 — EU 역외 제품. 수입 단계에서의 검역, 세관과 시장감시 당국의 협력.

Chapter 9 — 국제 무대. 상호인정협정(MRA), 국제 표준화와의 관계.


왜 Blue Guide가 중요한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개별 법령은 각각의 제품군만 다루지만, Blue Guide는 체계 전체를 다룬다.

기계류 규정(Machinery Regulation)은 기계에 대해서만 쓴다. 의료기기 규정(MDR)은 의료기기에 대해서만 쓴다. 그러나 이 법령들이 공유하는 공통 구조 — 필수 요구사항, 모듈 체계, NB, 인정, 시장감시 — 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문서는 Blue Guide뿐이다.

개별 법령은 나무다. Blue Guide는 숲이다.

둘째, Blue Guide는 Decision 768/2008/EC의 실질적 해설서다.

A-1-1에서 다뤘듯이, Decision 768/2008은 모든 EU 조화 법령이 따라야 할 “공통 문법”이다. 그런데 Decision 768 자체는 법조문으로만 쓰여 있어, 읽기 어렵다. Blue Guide는 이 공통 문법을 실무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쓴 문서다.


[필자 분석] Blue Guide가 보여주는 EU 규제의 자기 설명 능력

여기서 한 가지 독특한 점을 짚어야 한다.

EU는 복잡한 규제 체계를 만들어 놓고, 그 체계를 설명하는 종합 해설서까지 공식 문서로 발행한다. 그것도 EU 관보에 게재해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제품안전 체계를 생각해 보자.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 제품안전기본법, 각종 고시와 시행규칙이 있다. 그런데 이 체계 전체를 하나의 문서로 종합 해설한 공식 문서가 있는가. 법령별 해설은 있을 수 있지만, 체계 전체의 설계 논리를 하나의 서사로 설명하는 문서는 찾기 어렵다.

EU의 Blue Guide는 규제 체계의 “자기 설명 능력(self-explanatory capacity)”을 보여준다. 체계를 만든 사람이 체계를 설명하는 데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규제의 대상이 되는 기업 — 특히 EU 역외의 한국, 중국, 미국 기업 — 에게 규제를 이해시키는 것이 규제의 실효성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설계된 규제라도, 대상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준수율이 떨어진다.

Blue Guide는 120페이지짜리 문서 하나로, EU 제품규제의 접근 장벽을 크게 낮춘다. EU AI Act가 시행되면서 AI 기업들이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느냐”고 물을 때, 답은 하나다. Blue Guide부터 읽어라.²


마무리: 지도가 있어야 도시가 작동한다

법령은 도시의 규칙이다.

그러나 규칙만으로 도시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누군가 그 규칙을 지도로 만들어, 처음 온 사람도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Blue Guide는 EU 제품규제라는 도시의 공식 지도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이 지도 없이는 그 도시에서 방향을 잡을 수 없다.

A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이 지도의 주요 지점을 하나씩 따라왔다. 이제 지도 전체를 한 번 펼쳐본 셈이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 지도 위에 새로 그려진 구역 — AI Act — 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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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1]: The ‘Blue Guide’ on the implementation of EU product rules 2022, Commission Notice, OJ C 247, 29.6.2022. https://eur-lex.europa.eu/legal-content/EN/TXT/?uri=OJ:C:2022:247:TOC [^2]: Blue Guide 2022는 EU AI Act 이전(2022년)에 발행되었으므로, AI Act에 대한 직접 해설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AI Act가 NLF 체계 위에 설계된 만큼, NLF의 공통 구조(모듈, NB, 시장감시 등)를 이해하는 데 Blue Guide가 필수적이다. EU 집행위원회가 AI Act 시행에 맞춰 Blue Guide를 업데이트할 가능성이 있다. [검토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