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 법이 침묵할 때, 기업은 무엇을 하는가
법이 침묵할 때, 기업은 무엇을 하는가
— 신뢰는 어떻게 설계되는가 description: 유럽이 40년에 걸쳐 설계한 제품안전 체계 NLF의 탄생 배경과 논리를 추적한다.
| _Series A. EU 제품안전 기초: NLF(New Legislative Framework)를 해부한다 | A-1_ 다음 글: [A-1-1] 같은 것처럼 보이는 세 단어: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 |
우리는 매일 수십 개의 제품을 믿는다.
버튼을 누르면 멈출 것이라는 믿음으로 전동 공구를 쥔다. 콘센트에 꽂으면 폭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충전기를 연결한다. 처음 만난 제조사의 제품을, 단 한 번도 공장을 방문하지 않고, 단 한 줄의 설계도도 읽지 않고 믿는다.
그 믿음의 근거를 우리는 거의 확인하지 않는다. 그저 작은 마크 하나를 보고 구매한다.
CE.
두 글자 뒤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에는 40년에 걸친 하나의 질문이 압축되어 있다. 서로 다른 27개 나라의 기업과 소비자가, 한 번도 만나지 않고도, 어떻게 서로를 믿을 수 있을까.
한때 유럽도 믿지 못했다
1985년 이전의 유럽을 상상해보자.
독일의 한 계량기 제조사가 저울을 만든다. 독일이 요구하는 안전 기준을 모두 충족했다. 그런데 프랑스 국경에서 막힌다. 프랑스의 기준이 다르다. 이탈리아도, 스페인도 제각각이다.
당시는 더 심했다. EU의 공식 해설서 블루 가이드(Blue Guide, 2022)는 이 시절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계량기와 같은 정밀기기 분야에서는 정부 공무원이 직접 공장에 와서 제품 하나하나를 검사하고 도장을 찍었다.¹ 기업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정부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팔 수 없었다. 정부가 심판이자 검사관이었다.
이것이 Old Approach다. 각국 정부가 경제 주체를 신뢰하지 못해, 모든 기술 규격을 법령에 직접 박아넣고 스스로 검증하던 시대.
조선시대 경국대전이 그랬다. 나라 운영 원리부터 관리의 복장, 제례 절차까지 법전 한 권에 다 담았다. 세상이 바뀌어도 법전은 그대로였다. 유럽의 Old Approach도 같은 운명이었다.
기술이 바뀌면, 법이 뒤처졌다.
새로운 소재가 나왔다. 법에 없었다. 새로운 구조가 나왔다. 법에 없었다. 법을 개정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그사이 기업은 멈춰 서 있었다.
27개 나라가 단일 시장을 만들려면 이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
발상의 전환: 방법 대신 목표를 쓰다
1985년, 유럽은 질문을 바꾼다.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법에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가”만 법에 쓰면 어떨까.
이것이 New Approach(신접근방식)의 핵심이다.
법령에는 제품이 달성해야 할 필수 요구사항(Essential Requirements)만 남긴다. “기계는 사용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두께 몇 mm, 재질 무엇, 색상 어떤 색 — 그런 내용은 없다. 목표만 있다.
방법은 기업의 몫이다.
단, 여기서 절묘한 장치 하나가 추가된다. 유럽 표준화 기구(CEN, CENELEC 등)가 “이렇게 만들면 법적 요건을 충족한다”는 구체적 방법을 조화 표준(Harmonised Standards)으로 제시한다.
이 표준을 따르면 국가가 인정해 준다. “일단 안전하다고 간주한다.”
이것이 적합성 추정(Presumption of Conformity)이다.²
표준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다른 방식으로 안전을 입증하면 된다. 자유는 있다. 단, 그 경우엔 입증 책임이 기업에게 온다.
자유를 줬다. 책임도 함께 줬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목표는 정했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그리고 그 증명을 수행하는 체계는 누가 운영하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Global Approach(1989년)와 NLF(2008년)로 이어진다. 이 세 개념의 정확한 구별은 이 글의 다음 편 [A-1-1]에서 자세히 다룬다.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 —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다른 질문에 대한 다른 답이다.
믿음의 구조를 완성하다: NLF
2008년, 유럽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최종 답을 낸다.
인증기관을 감시하는 인정기구(Accreditation Body)를 체계화하고, 시장에 나온 제품을 사후에 감시하는 시장감시 당국(Market Surveillance Authority)을 하나의 틀 안에 통합한다.
NLF(New Legislative Framework, 신법률적 프레임워크)의 완성이다.³
세 층의 구조로 이해하면 명확하다.
1층 (법령) — 목표만 쓴다. 기술 중립적이다. 어떤 신기술이 나와도 법은 낡아지지 않는다.
2층 (조화 표준) — 목표를 달성하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기술 전문가 집단이 만들고, 기술이 바뀌면 표준도 바뀐다. 법 대신 표준이 기술을 따라간다.
3층 (기업과 시장) — 기업이 증명 방법을 선택하고, 인증기관이 검증하고, 감시 당국이 사후 관리한다. CE 마크는 이 모든 과정의 결과물이다.
[필자 분석] 이 설계의 진짜 의도
많은 소개 글이 NLF를 “유연한 규제”라고만 묘사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설명이다.
NLF의 더 깊은 목적은 규제의 내구성에 있다.
법을 개정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기술은 18개월마다 바뀐다. 법령에 기술 사양을 박아두는 방식은, 규제가 항상 기술보다 한 발 뒤처지는 구조를 만든다. NLF는 법이 기술을 따라가려 하지 않는다. 대신 표준이 기술을 따라가게 설계했다. 법은 목표만 지키면 된다.
이 설계는 40년 뒤 AI 규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EU AI Act가 “AI 시스템은 안전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쓰지, “모델의 파라미터는 몇 억 개 이하여야 한다”고 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0년 전에 만든 설계 원리가 AI 시대에도 작동하는 이유다.
규제를 읽을 때, “무엇을 규제하는가”만 보면 반만 보는 것이다. “왜 이렇게 설계되었는가”를 함께 봐야, 다음에 나오는 모든 법령이 같은 구조로 읽히기 시작한다.
신뢰는 자연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수십 개의 제품을 믿는다. 그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우리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해서가 아니다. 누군가 목표를 정했고, 누군가 방법을 제시했고, 누군가 검증했고, 누군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뢰는 설계된다.
CE 마크는 그 설계의 결과물이다. 작은 두 글자 안에, 40년에 걸쳐 가다듬은 인간의 협력 구조가 들어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설계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이름 —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 — 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다른지를 들여다본다.
→ 다음 글: [A-1-1] 같은 것처럼 보이는 세 단어: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 →→ 이후: [A-2] 인증 모듈(A~H)은 기업 맞춤 메뉴판이다
주석 ¹ Blue Guide on the implementation of EU product rules 2022, OJ C 247, 29.6.2022, Section 1.1.1. 법정계량(legal metrology) 분야에서는 Old Approach 하에서 공공기관이 직접 적합성 증명서를 발급한 사례가 있었음을 명시. PTB, H. Stolz, slide 24 교차 확인. ² Blue Guide 2022, Section 1.1.3. 조화 표준 준수 시 법적 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추정하는 원칙. PTB, H. Stolz, slide 8 교차 확인. ³ Blue Guide 2022, Section 1.2. NLF는 Decision 768/2008/EC(적합성 평가 모듈), Regulation 765/2008/EC(인정 및 시장감시), Regulation 764/2008/EC(비조화 제품 상호인정)로 구성됨. PTB, H. Stolz, slide 33 교차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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