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1] 같은 것처럼 보이는 세 단어: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
— 유럽이 40년에 걸쳐 대답한 세 개의 질문
description: “유럽이 40년에 걸쳐 설계한 제품안전 체계 NLF의 탄생 배경과 논리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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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공부하다 보면 비슷한 이름이 겹쳐 나올 때가 있다.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
셋 다 EU 제품규제 이야기를 할 때 등장한다. 셋 다 “유럽의 유연한 규제 철학”을 설명할 때 언급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뭉개진다. “다 같은 거 아닌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중요하다.
세 개념은 사실 하나의 긴 질문에 대한 세 개의 서로 다른 대답이다.
먼저 질문을 분리해야 한다
건물을 짓는다고 상상해보자.
누군가 세 가지를 물어온다.
“이 건물이 달성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 “그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그 증명을 누가, 어떤 체계로 관리하는가?”
세 질문은 서로 다르다. 각각에 대한 답도 달라야 한다.
New Approach, Global Approach, NLF는 정확히 이 세 질문에 대한 유럽의 세 가지 답이다.
첫 번째 질문: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가
답: New Approach (1985년)
1985년, 유럽은 첫 번째 전환을 결단한다.
법령에 기술 규격을 모두 박아넣는 방식을 버리고, “달성해야 할 목표”만 법에 쓰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New Approach다.
법은 이렇게만 쓴다. “제품은 사용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소재를 쓸지, 두께는 몇 mm일지 — 그것은 법의 영역 밖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기업이 스스로 선택한다.
PTB(독일 연방물리기술연구소) 자료는 New Approach의 원칙을 이렇게 요약한다.¹
“입법은 필수 요구사항(Essential Requirements)으로 제한된다. 필수 요구사항을 충족한 제품만 시장에 출시될 수 있다.”
New Approach가 답한 것: “무엇(What)”
New Approach가 답하지 않은 것: “어떻게(How)”
바로 이 빈칸이 문제였다.
“목표는 알겠다. 그런데 내 제품이 그 목표를 충족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나?”
두 번째 질문: 어떻게 증명하는가
답: Global Approach (1989~1990년)
New Approach가 “무엇”을 정했다면, 누군가 “어떻게”를 정해야 했다.
1989년, 유럽은 두 번째 답을 낸다. Global Approach다. 핵심은 모듈(Module) 시스템의 도입이다.
제품의 위험도와 기업의 규모에 따라,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적합성 증명 방법의 메뉴판을 만든 것이다. 설계 단계를 검증받을 것인지, 생산 단계를 감시받을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 모듈 A부터 H까지, 기업이 상황에 맞게 고른다.²
비유하자면 이렇다. New Approach가 “이 건물은 지진에 안전해야 한다”고 목표를 정했다면, Global Approach는 “내진 설계를 증명하는 방법은 구조계산서 방식, 실물 진동 실험 방식, 또는 품질관리 시스템 인증 방식 중에 하나를 골라라”고 메뉴판을 내민 것이다.
Global Approach가 답한 것: “어떻게(How)”
Global Approach가 답하지 않은 것: “누가, 어떤 체계로(Who & Ecosystem)”
증명 방법이 생겼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그 증명을 수행하는 인증기관은 믿을 수 있는가? 인증서를 발급한 기관이 제대로 검증받은 곳인지 누가 보증하는가? 제품이 시장에 나온 뒤에는 누가 감시하는가?”
세 번째 질문: 누가, 어떤 체계로 관리하는가
답: NLF (2008년) — 세 개의 규정
2008년, 유럽은 가장 복잡한 세 번째 답을 낸다.
New Approach와 Global Approach로 설계된 이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전체 생태계를 지탱하는 인프라가 필요했다. 이 인프라는 세 개의 별도 규정으로 구성된다.³
Decision 768/2008/EC — 조화 제품의 공통 언어
이것은 기업에게 직접 적용되는 법령이 아니라, EU 입법자들이 법을 만들 때 따르는 설계도(템플릿)다. 이후 나오는 모든 EU 조화 법령 — 기계류 규정, 의료기기 규정, AI Act 등 — 이 동일한 용어 정의와 동일한 모듈 체계를 쓰도록 표준화한다. 모든 법령이 같은 언어로 쓰이게 만드는 역할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법령이 따를 공통 문법”
Regulation 765/2008/EC — 인정(Accreditation)과 시장감시
두 가지 핵심 인프라를 법제화했다.
하나는 인정(Accreditation) 체계다. 인증기관을 믿을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최상위 기관, 즉 인정기구(Accreditation Body)의 역할과 권한을 규정한다. 독일의 DAkkS, 한국의 KOLAS 같은 기관이 이 역할을 맡는다. “인증기관을 검증하는 기관을 누가 검증하는가”라는 무한 후퇴를 막는 구조다.
다른 하나는 시장감시(Market Surveillance) 체계다. 제품이 시장에 나온 뒤 감시하는 당국의 권한과 절차를 규정한다. (현재 이 부분은 Regulation 2019/1020으로 대체·강화됨)
쉽게 말하면: “인증기관을 믿게 만드는 체계 + 시장 사후 감시”
Regulation 764/2008/EC — 비조화 제품의 상호인정
조화 표준이 없는 제품군(비조화 제품)에 대한 규정이다. A국가에서 합법적으로 팔리는 제품은, 별도 조화 기준이 없다면 B국가에서도 팔 수 있어야 한다는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 원칙을 법제화했다.
쉽게 말하면: “공통 기준이 없는 제품에 대한 최소한의 시장 통합 보장”
참고로 이 규정은 현재 Regulation 2019/515로 대체되었다. 절차가 복잡하고 국가 간 거부가 빈번했던 문제를 개선한 것이다.
NLF가 답한 것: “누가, 어떤 체계로(Who & Ecosystem)”
세 개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New Approach는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정했다. 목표(Essential Requirements)만 법에 쓴다.
Global Approach는 “어떻게 증명하는가”를 정했다. 모듈(Module A~H)이라는 증명 방법의 메뉴판을 만들었다.
NLF는 “누가, 어떤 생태계로 관리하는가”를 정했다. 인증기관을 검증하고, 시장을 감시하고, 모든 법령이 같은 언어를 쓰게 만드는 세 개의 규정으로 완성했다.
[필자 분석] 세 개가 아니라 사실 하나의 건물이다
세 개념이 혼동되는 이유는 실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PTB 자료를 보면, New Approach의 원칙 목록 마지막 항목에 이미 “제조사는 Global Approach가 제공하는 적합성 평가 절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⁴ 즉 New Approach와 Global Approach는 처음부터 세트로 설계되었고, NLF는 그 위에 올려진 지붕이다.
세 개가 아니라 하나의 건물이다. 용어가 세 개로 나뉜 것은 시간 순서로 — 1985년, 1989년, 2008년 — 답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지, 별개의 체계여서가 아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모듈(Module A~H)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기업은 어떤 기준으로 모듈을 고르는가. 그 이야기가 다음 편에서 이어진다.
셋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긴 질문에 대한 연속된 대답이다.
1985년에 “무엇”을 정했고, 1989년에 “어떻게”를 정했고, 2008년에 “누가”를 정했다.
그리고 그 세 대답이 합쳐진 것이 오늘 우리가 CE 마크 뒤에서 보는 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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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¹ H. Stolz, PTB, “Notification of MID and NAWID Conformity Assessment Bodies,” 2014, slide 8. ² H. Stolz, PTB, ibid., slide 9, 19. Global Approach 모듈 흐름도(설계 단계-생산 단계 분리 구조) 참조. ³ H. Stolz, PTB, ibid., slide 33. NLF 3개 규정 도식. Blue Guide 2022, Section 1.2 교차 확인. ⁴ H. Stolz, PTB, ibid., slide 9. “Manufacturers may choose between different conformity assessment procedures provided for in the corresponding directive (‘Global Appr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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