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경험의 멸종(The Extinction of Experience)
- 읽은 기간: 2026.02.05 - 2024.02.28
- 저자: 크리스틴 로젠
AI 시대, 5살 아이의 아빠가 던지는 질문
“인간은 무엇이고, 기술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1. 이 책을 집어 든 이유
나는 X세대다. 어릴 적 동네에서 소와 강아지를 키우며 흙을 밟던 아이였고, PC통신 시절 삐- 소리를 내며 접속하던 청소년이었고, 인터넷과 모바일을 거치며 어른이 되었다. 손에 흙을 묻히던 시대에서 손에 스마트폰을 쥔 시대까지, 기술이 삶을 바꿔온 과정을 온몸으로 겪어왔다.
그런데 요즘, 5살 아이의 아빠로서 마음이 무겁다. AI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에서 이 아이에게 어떤 능력을 길러줘야 할까? 혹시 인간이 AI에게 마치 물고기가 인간에게 그런 것처럼, 존재 자체가 무시되는 관계가 되지는 않을까? 이런 불안이 자연스럽게 이 책을 손에 들게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고민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000년 전 소크라테스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기술은 석기시대부터 증기기관, 컴퓨터, 그리고 AI까지 끊임없이 바뀌었지만,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단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다.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을 기술의 렌즈로 다시 비추어 보는 책이다.
2. 우리 뇌의 두 얼굴: 시스템 1과 시스템 2
이 책의 핵심 논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시스템 1과 시스템 2라는 개념을 알면 좋다.
시스템 1은 우리 뇌의 “자동 모드”다. 비유하자면,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밟는 발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작동한다. 화난 표정을 보면 즉시 “저 사람 화났다”고 판단하고, 1+1=?을 보면 생각할 것도 없이 2가 떠오른다. 빠르고, 자동적이고, 직관적이다. 파충류의 뇌에도 이런 시스템이 있다.
시스템 2는 “수동 모드”다. 17×23=?을 계산하거나, 복잡한 계약서를 분석하거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작동한다. 느리지만 깊이 있고, 에너지를 많이 쓰지만 논리적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이 바로 이 시스템 2다.
문제는 이것이다. 오늘날의 기술은 시스템 2를 대신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할 영상을 알아서 골라주고, 네비게이션은 길을 외울 필요를 없애주고, SNS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편리하다. 하지만 시스템 2를 쓸 기회가 줄어든다는 건, 마치 팔 근육을 쓰지 않으면 팔이 굳어버리는 것처럼,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능력 자체가 퇴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경험의 멸종”이란, 결국 시스템 2가 필요한 경험들—기다림, 지루함, 손글씨, 낯선 사람과의 대면—이 기술에 의해 사라져가는 현상이다. 편한 것만 추구하도록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기술이 그 방향으로 인간을 밀어붙이고 있는 셈이다.
3. 경험이 사라진다는 것
3-1. 손글씨가 가르쳐주는 것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것과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키보드는 “추상적이고 분리된” 방식이지만, 손글씨는 손가락과 팔뚝의 움직임, 잉크와 종이의 마찰, 글자의 모양까지 온몸이 관여하는 물리적 행위다.
핀란드의 건축가 유하니 팔라스마는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 건축가와 건물 사이의 진짜 연결을 만든다고 했다. 컴퓨터 설계는 “가짜 정확성”으로 디자이너를 오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론 머스크가 강조하는 “물리학은 법칙이고, 그 외의 것은 권장 사항”이라는 첫 번째 원칙(First Principles) 사고와도 통한다.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세상을 진짜로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이야기다.
더 중요한 것은 속도를 늦추는 것의 가치다. 키보드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 생각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시간이 있어야 사색이 있고, 사색이 있어야 집중과 관찰이 있고, 그래야 비로소 창의성이 싹튼다. 인내, 끈기, 성실—이런 가치는 손으로 일하면서 쌓아올린 것들이다. “혁신으로 위장한 무책임에 서둘러 보상을 주는” 기술 시대의 미덕과는 결이 다르다.
3-2. 기다림과 지루함이 선물하는 것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수백 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오늘날 우리는 1분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스마트폰을 꺼낸다.
그런데 지루함을 견디는 것은 자기 조절 능력의 핵심이다. 스마트폰은 지루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에 맡겨서 지루함에 “대처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문제는 주의력이 약해지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불안과 지루함 사이의 공간이 창의성이 번성하는 곳”이다. 아이들의 창의력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가 시간에 스크린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만의 상상력이 발휘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기기가 아이의 주의를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휴가 자체가 아니라 휴가에 대한 기대였다. 기다림에는 설렘이 있고, 상상이 있고, 기대가 있다. 기술이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만들어버리면, 이 달콤한 기대의 시간마저 빼앗기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3. 장소가 사라지면 공동체도 사라진다
공간(space)은 그냥 빈 곳이지만, 장소(place)는 “경계가 생기고 인적 요소가 가미”될 때 만들어진다. 동네 시장, 공원 벤치, 도서관—이런 곳에서 우리는 아는 사람뿐 아니라 낯선 사람도 만나고, 대면하고, 타협하고, 어울린다. 온라인에서는 피할 수 있는 불편한 만남도 물리적 장소에서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함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성장시킨다.
공무원으로서 현장 방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류와 데이터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현장에서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때 비로소 보인다. 공정하고 공평한 업무를 위해서도, 화면 너머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필수적이다.
4. 일론 머스크는 기술 만능주의자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론 머스크를 기술 만능주의의 대표 주자로 여긴다. 화성 이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뉴럴링크), 자율주행 전기차—겉보기에는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머스크를 마크 저커버그, 빌 게이츠와 비교해보면, 그의 결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커버그: “빠르게 움직이고 부숴라(Move fast and break things)”
저커버그의 철학은 기술 진보가 거의 언제나 긍정적이며, 사회적·윤리적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머스크가 AI의 위험성을 경고했을 때, 저커버그는 그런 경고가 “꽤 무책임하다(pretty irresponsible)”고 일축했다. 메타버스라는 가상 세계에 인류를 귀속시키려는 비전은, 이 책이 경고하는 “경험의 멸종”과 정확히 일치하는 방향이다. 개인화된 가상 공간에서 현실의 불편함을 피하고,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것만 보는 세상—저커버그가 그리는 미래다.
빌 게이츠: “AI는 괜찮다, 공포를 조장하지 말라”
게이츠 역시 기술 진보에 대해 낙관적이다. AI가 인류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은 “임박한 위험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고, 머스크의 경고에 대해 “공황 상태에 빠질 필요 없다”고 반박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OpenAI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상업화를 밀어붙인 것도 이런 맥락이다. 기술이 가져올 이익이 위험보다 크다는 확신 아래,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머스크: “인간이 먼저다”
머스크는 다르다. 그는 2015년 OpenAI를 공동 설립할 때, 그 동기가 “구글이 AI 안전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고 밝혔다. AI가 “인류 문명에 대한 근본적 위험”이라고 경고했고, 정부 규제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인간을 “로봇 주인의 집고양이”로 비유하며 위험성을 알렸다.
머스크가 저커버그, 게이츠와 거리를 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당장의 이익과 시장 지배력에 집중하는 동안, 머스크는 “이 기술이 인간 존재 자체에 어떤 의미인가”를 먼저 묻는다. SpaceX로 다행성 종족의 꿈을 꾸면서도, Neuralink로 인간 뇌를 연구하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항상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원칙이 깔려 있다.
이것은 1950년대 MIT에서 더글러스 엥겔바트가 마빈 민스키에게 던진 질문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민스키가 “지능 있는 기계를 만들겠다!”고 외쳤을 때, 엥겔바트는 이렇게 물었다. “그 모든 일을 기계를 위해 하겠다고요? 그럼 사람들을 위해서는 뭘 할 겁니까?” 머스크는, 적어도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사람이다.
5.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전에 읽었던 『레버리지』를 떠올리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카너먼은 행복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경험하는 자아”의 행복—지금 이 순간 느끼는 즐거움이다. 다른 하나는 “기억하는 자아”의 행복—돌아보았을 때 내 인생이 의미 있었다고 느끼는 만족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이 종종 엇갈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3시간 시청하는 것은 경험하는 자아에게는 즐겁다(시스템 1이 좋아하는 자극). 하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남는다(기억하는 자아의 불만족). 반대로, 어려운 책을 읽거나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은 당장은 힘들지만(시스템 2의 에너지 소모), 돌아보면 깊은 만족을 준다.
오늘날의 기술 대부분은 경험하는 자아의 행복만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넷플릭스의 자동재생, 틱톡의 무한 스크롤, 게임의 보상 시스템—모두 지금 이 순간의 쾌감에 최적화되어 있다. 하지만 기억하는 자아가 만족하는 행복—성취, 성장, 의미 있는 관계—은 반드시 시스템 2의 노력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다.
몽테뉴는 이렇게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다른 곳으로, 미래로 서둘러 움직인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유한한 시간을 그저 죽이고 있는 것이다.
『레버리지』의 저자 롭 무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시간을 “낭비된 시간, 소비된 시간, 투자된 시간”으로 나누면서, 진정한 자유는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결정과 감정을 관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기술은 이 관리를 도와주는 도구여야지, 관리 자체를 대신해버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행복은 “가치 있는 삶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팔이 안으로만 굽으면 몸이 움츠러드는 것처럼, 편한 것만 하도록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땀을 흘리는 것, 기다리는 것, 지루함을 견디는 것—이 모든 불편함 속에 행복의 씨앗이 숨어 있다.
6.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양면적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문장이 있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양면적이다.”
기술의 역할은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지, 내 몸과 마음보다 나의 욕구를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센서와 알고리즘으로 감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구글이 정리한 당신의 인생 이야기는, 당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기억, 취약성, 한계에 대한 감각을 잃으면, “육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나만 산속이나 절에 가서 기술을 거부하며 살 수는 없다. 그건 더불어 사는 인간 존재로서 바람직하지도 않고, 너무 외롭지 않겠는가. 결국 필요한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놓고 기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7. 아빠로서의 다짐
5살 아들에게 AI를 가르칠 때, 그것이 인간의 증강(augmentation)이 되어야지, 인간의 대체(replacement)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아이의 고유한 특성—호기심, 상상력, 모순을 품는 능력, 회복탄력성—이 기술에 의해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아이에게 흙을 만지게 하고, 지루함을 견디게 하고, 손으로 글을 쓰게 하고, 낯선 사람과 인사하게 하는 것—이런 소박한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 아빠인 내가 할 일이 아닐까.
경험은 멸종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소멸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부록: 이 독후감의 독창적 관점 정리
이 독후감에서 책의 일반적 내용과 구분되는, 나만의 관점과 연결들을 정리한다.
(1) 기술이 시스템 2를 대체한다는 프레임
책의 저자는 카너먼의 시스템 1/2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나는 “기술이 인간의 경험을 빼앗는다”는 책의 논지를 “기술이 시스템 2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프레임으로 재해석했다. 이 연결은 기술 비평과 행동경제학을 잇는 나만의 독법이다.
(2) 머스크를 저커버그·게이츠와 대비하는 분류
일반적으로 머스크는 기술 낙관론자로 분류되지만, 나는 그를 “인간 중심 기술론자”로 재분류했다. 머스크가 OpenAI를 설립한 동기(AI 안전성 우려), 저커버그의 “무책임하다” 발언에 대한 반박, 게이츠의 낙관론과의 차이를 통해, 머스크가 엥겔바트(지능 증강) 쪽에 더 가깝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는 세 거인을 단순한 기술 만능주의자로 뭉뚱그리지 않고, 그 안의 철학적 스펙트럼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3) 카너먼의 두 자아와 행복의 재정의
경험하는 자아(시스템 1의 쾌감)와 기억하는 자아(시스템 2의 성찰)를 기술 비평에 적용한 것은 나만의 연결이다. “오늘날 기술이 경험하는 자아의 행복만 극대화한다”는 관점에서, 행복을 “가치 있는 삶을 만드는 과정”으로 재정의했다. 이는 『레버리지』에서 롭 무어가 말하는 “투자된 시간”의 개념과도 연결된다.
(4) 공무원 현장 경험과 장소의 소멸
책이 말하는 “장소의 소멸”을 공무원의 현장 방문 문화와 연결한 것은 나의 직업적 경험에서 나온 관점이다. 서류와 데이터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현장에서 보인다는 실무적 통찰을, 기술 비평의 맥락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5) “팔이 안으로 굽으면 몸이 움츠러든다”는 비유
편한 것만 추구하면 안 되는 이유를 스트레칭에 비유한 것은 책에 없는 나만의 표현이다. 신체적 원리(근육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를 정신적 원리(시스템 2를 쓰지 않으면 사고력이 퇴화한다)에 대입한 것으로, 리처드 파인만식의 “쉬운 설명”을 지향한 비유다.